<왓치맨> Review - 영웅에 대한 근본적 회의 FILM

<왓치맨>은 코미디언이라는 캐릭터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왓치맨 중 가장 오랫동안 자경단 역할을 해온 코미디언의 죽음을 파헤치는 내러티브로 구성된 영화는, 코미디언이 괴한에게 죽임을 당하는 오프닝부터 주제의식을 자연스럽게 깔아놓았다. 코미디언의 죽음 이면에 숨겨진 비밀을 본격적으로 파헤치는 로어셰크의 등장 이전에 오프닝 시퀀스에 숨겨진 복선부터 분석할 필요가 있다.


대체역사(Alternate History)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는 <왓치맨>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끝나지 않은 8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미국과 소련의 반목의 골은 점점 깊어지고, 곧 핵폭탄을 이용한 3차 세계대전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위태로운 사회를 그리고 있다. 코미디언이 틀어놓은 TV에선 계속 미소 냉전의 상황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음을 보여주는 프로그램들이 방송되고 있는데, 그중 토론프로그램에선 사회자가 소련이 실제 미국을 공격할 가능성에 대해 각각의 패널에게 묻는다. 먼저 남자 패널은 소련은 절대로 전쟁을 감행하지 못한다고 확신한다. 이유는 미국에 걸어 다니는 핵 억제력인 닥터 맨해튼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닥터 맨해튼은 왓치맨 중 유일하게 신에 가까운 능력을 지닌 진짜 초능력자다. 곧이어 여자 패널에게 같은 질문을 하자, 여자 패널은 오히려 닥터 맨해튼이 존재하기에 소련이 두려움을 가지게 되어 계속 핵실험을 하는 것이라는 반대주장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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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그동안의 슈퍼히어로 영화가 지녔던 영웅성의 커다란 두 개의 범주를 압축하여 보여준다. 남자 패널의 말은 영웅이 모든 걸 해결해줬던 시절, 즉 <슈퍼맨>으로 대변되는 하나의 절대 권력이 모든 걸 해결해주는 방식의 영웅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반대로 여자 패널의 말은 영웅이라는 힘이 존재함으로써 더 큰 악을 불러들이는, <다크나이트>로 대변되는 자경단 역할의 한계를 인식하는 영웅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쇼트13) 영화는 이렇게 슈퍼히어로 영화가 영웅을 다뤘던 논의의 두 가지 측면을 요약한 뒤, 보란 듯이 그동안의 논의를 파기한다. 남녀 패널의 의견을 다 들은 코미디언은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며 채널을 돌리는데, 그렇게 돌린 채널에선 이미지, 쾌락, 상업주의 등으로 상징되는 MTV가 방송되고 있다.(쇼트14) 이러한 의도적인 쇼트 배열을 통해 <왓치맨>은 기존의 슈퍼히어로 영화가 영웅성을 다루는 방식에 상징적으로 반감을 표한 것이다. 이러한 기조는 <왓치맨>의 전반적인 정서이고, 엔딩에선 절정에 이르게 된다. 영화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영웅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음을 담담히 밝히며 시작한다.


영화의 초반부, 2대 나이트 아울이 초대 나이트 아울을 만나 왓치맨이 조직된 역사를 듣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초대 나이트 아울은 법으로 안되는 걸 끝내기 위해 갱들처럼 가면을 쓰고 나온 자경단은 미디어를 타자마자 "국민적 오락거리(national passtime)"가 됐다는 표현을 쓴다. 은퇴 후 자경단 시절의 이야기를 책으로 발간하고, 추억에 젖어 사는 자부심 강한 초대 나이트 아울마저도 자신들이 대중에게 영웅으로 인정받은 게 아니라 흥미와 호기심의 대상이었을 뿐이라는 걸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얼핏 보면 향수영화의 면모까지 띔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결코 과거의 영웅(주의)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가 강조하는 반영웅주의 기조와는 별개로 캐릭터들은 영웅으로 지냈던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초대 나이트 아울의 자조적인 회상은 과거를 부정한다기보다 일종의 반어법으로 작용한다. 초대 나이트 아울이 등장하는 장면은 첫 쇼트부터 과거의 화려했던 경력의 기사들을 스크랩해놓은 벽면에서 시작하고, 대화의 중심은 온통 과거에 맞춰져있다. 심지어 불평불만마저도 과거에 관한 것이다. 그들의 대화엔 현재 시점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2대 나이트 아울이 집으로 돌아갈 때 보이는 초대 나이트 아울의 정비소엔 “수리함 - 폐 모델 전문(We fix'em - Obsolete models a speciality)”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쇼트15) 이것은 그들이 과거, 구식, 예전의 방식을 그리워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다. 게다가 바로 이어지는 쇼트에선, 옥외에 걸려있는 "향수(Nostalgia)"라는 제품의 광고판이 화면의 상단을 차지하고 오랜 시간 비쳐진다.(쇼트16) 이것은 2대 나이트 아울이 비를 맞으며 쓸쓸히 걷는 모습과 겹쳐져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영웅들의 이야기로 영화가 채워질 것을 암시한다. 흥미로운 점은, 반영웅주의 기조와 과거 영웅행적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가 굉장히 상충된다는 것이다. <왓치맨>의 이러한 상충은 외적으론 과거에 집착하는 행위, 내적으론 영웅이라는 존재에 대한 그동안의 관념이 얼마나 순진하고 위험한 것이었는지 강조하는 기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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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나이트 아울은 여러 캐릭터 중에서도 평범한 모습(현재)과 영웅일 때(과거)의 격차가 가장 큰 인물이다. 나이트 아울은 실크 스펙터와의 관계를 통해 조금씩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데, 마침 두 사람이 섹스를 하려고 할 때 발기가 되지 않아 실패한다. 섹스 실패 후, 꿈에서 알몸 상태로 만난 두 사람이 서로의 가죽을 벗겨내자 가면을 쓴 영웅의 모습이 드러난다.(쇼트17-18) 이것은 과거에의 집착과 향수가 그 자체로 그들에겐 트라우마란 걸 묘사한다. 꿈에서 깬 나이트 아울은 실크 스펙터에게 다시 한 번 가면을 쓰고 출동하길 권하고, 나이트 아울은 가면을 써서 영웅의 신분이 된 이후에 발기가 되어 섹스에 성공한다. 현실에 안주해 사는 은퇴한 영웅의 잃어버린 남성성은 과거에의 회귀를 통해서만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는 이런 식으로 은퇴한 영웅들을 복귀시켜, 향수를 해소하게 만들지만 그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건 자신들의 영웅놀이가 불러올 처참한 결과뿐이다. 과거의 영웅주의는 환기되고, 정서적으로 잠시나마 캐릭터들과 동일시가 이루어지지만 그것이 깨졌을 땐 더 큰 반작용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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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코미디언의 죽음으로 돌아와서, 그의 장례식이 열릴 때 왓치맨들은 한명씩 코미디언과 있었던 일화를 추억한다. 먼저 코미디언의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은 2대 실크 스펙터는 초대 실크 스펙터인 어머니를 찾아간다. 초대 실크 스펙터가 자신을 강간하려 했던 코미디언을 상기하며 불쌍하다는 말을 하자, 딸인 2대 실크 스펙터는 역정을 낸다. 하지만 초대 실크 스펙터는 그와의 회상을 마치곤 “정의건 악이건 비 맞는 건 똑같아.(It rains on the just or the unjust alike)”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코미디언은 선악 양쪽 범주에 모두 포함되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코미디언 캐릭터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다. 바로 이어지는 닥터 맨해튼의 회상은 코미디언의 캐릭터를 좀 더 명확하게 보여준다.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닥터 맨해튼과 코미디언은 술집에서 자축을 한다. 갑자기 코미디언이 임신시킨 베트남 여자가 등장하여 책임을 묻자, 코미디언은 단호하게 거절한다. 화가 난 베트남 여자는 코미디언의 얼굴에 상처를 입히고 코미디언은 그녀를 총으로 쏴 죽인다. 임신한 여자를 쏴 죽이는 코미디언의 행동에 놀란 닥터 맨해튼에게 코미디언은 “넌 정말 인류에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어. 자넨 우리와 떨어져 놀고 있어, 닥터.(You really don't give a damn about human beings. You're drifting out of touch, doc)”라며 방관자적 자세를 비난한다. 이것은 마치 창조는 했지만 개입은 하지 않는 신의 태도와 비슷한 면모가 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코미디언의 대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신이 우리를 보살피길.(God help us all)”이다. 이처럼 냉소적이고 폭력적인 동시에 운명론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는 코미디언은 초대 실크 스펙터의 말처럼 정의와 불의, 선과 악, 피아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물이다. 코미디언의 이러한 캐릭터는 왓치맨들의 회상을 통해 조금씩 드러나고, 서로 다른 성격과 가치관을 지닌 캐릭터들 각각의 감춰진 내면 및 욕망을 드러내는 용매 역할을 한다.


이어지는 오지맨디아스의 회상에서 코미디언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힘을 합치려는 왓치맨들이 모인 회의의 분위기를 깬다. 자경단 노릇은 15년 전에도 안 통했고, 앞으로도 통하지 않을 거라면서 영웅주의에 빠진 왓치맨들을 인디언이나 카우보이쯤으로 조롱한다. 그러자 오지맨디아스는 “올바른 지도력으로(with the right leadership)” 세계를 구할 수 있다고 반박한다. 코미디언은 “그게 바로 너란 거지, 오지?(And that'd be you, right, Ozzy?)”라며 바로 주체의 문제를 지적한다. 곧이어 로어셰크와의 말싸움에서도 “정의는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지.(Justice is coming to all of us)”라며 주체의 문제를 재차 강조한다. 코미디언은 정의뿐만 아니라 그 정의를 실현하는 주체가 누구냐를 계속 상기시킨다.


코미디언의 말대로 ‘영웅이 정의를 실현한다’는 당연해 보이는 명제엔 근본적으로 두 가지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첫째는 주체성이다. 미국에겐 테러리스트가 중동에선 영웅으로 불리듯, 영웅성은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엄청난 해석차를 가지게 된다. 특히 자신에게 스스로 정의의 이름을 부여하는 순간, 대부분의 힘과 권력은 부패한다. 코미디언은 스스로에게 정의의 권위를 부여하는 행위를 극도로 경계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지맨디아스의 음모를 가장 먼저 알아차릴 수 있었고 또한 그 때문에 가장 먼저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을 정의(正義)로 정의(定意)할 것인지가 두 번째 문제다. 경계를 넘나드는 코미디언과 경계를 벗어나있는 닥터 맨해튼을 제외하고 왓치맨 중에서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모든 걸 불사하는 캐릭터는 로어셰크와 오지맨디아스 두 명인데, 그들의 정의는 대극을 이룰 만큼 다르다. 같은 팀이었고 사회정화를 위해 함께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의를 생각하고 구현하는 방식은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로어셰크는 인격주의와 과정중심으로 정의를 실현하고, 오지맨디아스는 공리주의와 결과중심으로 정의를 실현한다.

그동안 슈퍼히어로가 영웅으로 칭송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명의 목숨이라도 다수의 목숨과 저울질하여 가치를 매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지맨디아스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대변되는 공리주의적 계산에 따라 수백만 명의 목숨을 희생시켜 수십억의 인구를 살리는 길을 서슴없이 택한다. 그의 극단적인 선택 때문에 미국은 소련과의 냉전을 끝내고 대화합에 이르게 된다. 3차 세계대전이 벌어질 가능성을 수백만 명의 희생을 통해 제거한 것이다. 하지만 오지맨디아스가 주장하는 공리주의는 얼핏 보면 효율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그러한 희생양의 기제가 가진 치명적인 문제점은 항상 주체가 외부에 있다는 것이다. 아무도 희생당하는 입장의 효율이나 권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언가의 희생을 통해 얻게 된 결과는 새로운 희생을 만들어내지 않는 이상 존속될 수 없다.


자신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나이트 아울에게 오지맨디아스는 세계가 평화롭게 연합했고, 희생은 불가피했다고 말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넌 인류를 이상화하지 못했어. 일그러트리고 불구로 만들었어. 그게 네가 남긴 거야.(You haven't idealized mankind, you've deformed it. You've mutilated it. That's your legacy)”이다. 겨우 목숨은 부지했으나 팔다리를 희생한 반쪽짜리 가치밖에 되지 않는 평화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식의 강요된 희생을 통한 평화는 결코 오래 유지될 수 없다.


오지맨디아스의 선택은 또한 영웅주의와 엘리트주의가 결합되었을 때 드러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를 보여준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기조를 증명하듯 스스로를 정의라 생각했던 삐뚤어진 한명의 선택이 참혹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오지맨디아스라는 이름의 맥락적 의미처럼, 그의 능력이나 사상은 엘리트를 넘어서 왕의 지위에까지 이르려 한다. 닥터 맨해튼을 함정에 빠트린 후에 배치된 쇼트에는 그런 오지맨디아스의 야심이 노골적으로 담겨 있는 시구(詩句)가 보여진다. <왓치맨>은 오지맨디아스의 음모가 이뤄지는 과정을 통해 엘리트주의와 결합한 영웅성은 시대의 흐름에 부적합한 것은 물론 커다란 위험성을 내포한다는 사실을 극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오지맨디아스는 자신의 계획이 성공하고 미국과 소련이 연합했다는 뉴스를 보여주며, “이제 우린 돌아가는 거야, 예전의 우리로.(Now we can return do what we were meant to)”라는 말을 한다. 짧게 스쳐가는 이 대사엔 많은 의미가 함축돼 있다. 오지맨디아스가 수백만을 죽여서 수십억을 살리려 했던 이 계획은, 사실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라는 표면을 넘어서서 오지맨디아스 본인의 만족감과 엘리트 영웅으로서의 정체성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시대로의 회귀가 근원적 목표였던 것이다. 오지맨디아스의 행위가 전달하는 진짜 핵심은 힘을 가진 자의 정의(正義)와 사욕(私慾)이 합치됐을 때 사회에 끼치는 해악이란 이루 상상할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오지맨디아스에겐 엘리트 영웅주의가 살아있던 과거로의 회귀와 그러한 과거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현실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게 전혀 대립되는 관계가 아니다. 자기 정의에 빠진 영웅에겐 보편적 타당성이나 집단지성의 상식은 무능력자들의 쓸데없는 잡음으로 치부될 뿐이다.


보편적인 영웅서사의 흐름대로라면 오지맨디아스의 살상계획은 종국에 방해를 받아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지맨디아스는 이미 일을 벌인 후 동료들을 맞이하고, 영화는 그의 음모를 막는 것보다 대참극이 벌어진 후에 그걸 받아들이는 각각의 캐릭터를 통해 주제를 전달하는데 집중한다. 오지맨디아스의 행위를 받아들임에 있어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를 보이는 것은 닥터 맨해튼과 로어셰크다. 전자는 자신이 음모의 중심에서 모든 죄를 덮어썼음에도 불구하고 오지맨디아스의 계획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후자는 결코 타협할 수 없다며 진실을 세상에 알리겠다고 한다. 코미디언이 각각의 캐릭터들 사이에서 속마음을 끄집어내고 욕망을 발화시키는 역할을 했다면 오지맨디아스, 로어셰크, 닥터 맨해튼은 그릇된 영웅성 혹은 그릇되게 영웅을 숭배하는 행위의 위험을 직접 드러내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오지맨디아스의 음모를 파헤치는 주체인 로어셰크와 음모의 중심에 휘말리는 닥터 맨해튼의 캐릭터 분석을 통해 <왓치맨>의 주제인 영웅에 대한 근본적 회의에 대해 조금 더 깊숙이 접근할 수 있다. 먼저 로어셰크의 경우를 살펴보자.


로어셰크는 “비사회적 정신병환자(sociopath)”의 근성으로 범죄자와 악을 처단한다. 자신의 신념에 위배되는 것과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근성을 지니고 있다. 도덕적 완벽주의와 악에 대한 엄중한 처벌 등은 기존의 영웅과 큰 맥락에선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왓치맨>에서 가장 보편적인 영웅성을 지닌 것 같은 그조차도 명백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오지맨디아스의 함정에 빠져 감옥에 갇히게 된 로어셰크는 정신과 상담을 받는다. 그는 정신과상담의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는데, 이유는 그가 이 썩어빠진 사회에서 ‘교화’라 부르는, 죄를 이해하고 보호하려는 연민의 감정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로어셰크는 그런 것들과 절대로 타협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힌다. 이것은 전형적으로 보수우파의 논리와 같다. 법치주의를 중시하고, 범죄자와 타협을 하지 않는 논리는 보수우파의 기본적 신념과 맞닿아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지점은 그의 신념이 아니다. 신념의 옳고, 그름은 입장차이일 뿐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가 신념을 관철하는 방식의 오류다. 곧이어 정신과상담의에게 들려주는 로어셰크의 일화에 그런 지점이 잘 드러나 있다.


6살 소녀의 유괴 사건을 조사하던 로어셰크는 범인이 소녀를 잔혹하게 살해하여 개에게 먹이로 준 것을 발견하고 극도의 분노를 느낀다. 법망을 악용하여 자신의 범죄를 자백하고 체포당하길 원하는 범인 앞에서 이성을 잃고 매우 잔인하게 난도질했던 상황을 회상하며, 자신이 가진 개인의 정체성인 월터 코백스는 그날 소녀와 함께 죽었고 오직 로어셰크만 남았다는 말을 한다.


이것은 인간성 상실의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걸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것인데, 인간성을 희생시켜야만 얻을 수 있는 정의란 그 자체로 모순이다. 인간성 상실을 택하는 순간부터 로어셰크의 정의구현은 사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복면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게다가 긍정적 의미로 발화될 수 있는 도덕적 완벽주의는 로어셰크에게 있어 강박증으로 치환되는데, 이것은 불의나 악과 절대 타협하지 않는 강직함을 낳기도 했지만, 필요이상의 잔혹성과 무자비함 또한 초래했다. 이것이 심화되면 그의 범죄소탕에 대한 의지가 정의구현의 차원이 아닌 트라우마 해소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된다.


로어셰크가 정신과상담의에게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얘기할 때, “우리는 허가받았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아냐. 우리가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거야.(We don't do this thing because it's permitted. We do it because we have to)”라는 말을 하는데, 이것은 뒤집어보면 정의구현의 이유를 뚜렷이 설명할 수 없다는 뜻도 된다. 그리고 빈번히 등장하는 트라우마 플래시백은 로어셰크를 이런 함의 속에 더욱 단단히 가둔다.


존 로크는 “시민사회를 규정짓는 조건 가운데 매우 중요한 요소는 성원 모두 객관적인 판결과 형 집행을 위해 사적인 복수 권한을 포기하고 이를 합법적으로 구성된 정부에 일임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듯 개인의 사적복수나 본인의 욕망해소를 위해 행동하는 영웅은 진정한 의미의 영웅성을 획득했다고 볼 수 없다. 대의가 아닌 모든 명분은 액션영웅담이나 복수극으로 치환될 수는 있어도 슈퍼히어로가 되는 조건에는 부적합하다. 오지맨디아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보편적인 영웅성을 갖춘 듯 보이는 로어셰크마저도 <왓치맨>에선 뒤틀린 내면의 소유자로 그려진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오지맨디아스와 타협하지 않고 죽음을 택하는 그의 선택은 영화에서 드러나는 유일한 자기희생(극복)이다. 신문사에 모든 진실이 담긴 로어셰크의 일기가 도착하는 건, 그를 통해 영웅의 기능에 대한 일말의 가능성을 열어놓기 위함이다.


서로 대립되는 오지맨디아스와 로어셰크와 달리 닥터 맨해튼의 캐릭터는 영웅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 조금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자주 상술했듯 슈퍼히어로가 되는 필수조건은 슈퍼파워고, 그 힘은 반드시 책임을 동반한다. 이것은 마치 정언명령처럼 슈퍼히어로의 내면을 잠식하고 그러한 부담감을 극복해내는 순간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신으로 추앙받고, 신에 가까운 능력을 지닌 닥터 맨해튼은 오히려 힘을 얻게 된 시점부터 인간성을 잃어버린다.


닥터 맨해튼이 영웅이 되는 시점은 국가, 민족, 미디어가 개입하는 순간뿐이다. 실례로 과학자 존 오스터만이 실험실에서 사고를 겪고 닥터 맨해튼으로 부활했을 때 미디어가 가장 처음으로 한 일은 “슈퍼맨은 존재합니다. 그는 미국인입니다.(The superman exists, and he is American)”라는 프로파간다적 선언이다. 국가, 민족, 미디어는 그의 존재 자체에 대한 탐구나 고민은 접어둔 채 오직 그의 능력만을 도구적으로 활용하려 든다. 그렇게 닥터 맨해튼은 미국영웅이 되지만 그것은 만들어진 이미지에 불과하다. 정작 닥터 맨해튼의 실체로 묘사되는 것은 갱들을 죽이는데 일말의 동정심이 없고, 미성년자나 탐하는 비도덕적인 모습들이다. 바로 여기에 맹점이 있다. 사람들이 그를 신이나 영웅으로 추앙하거나 공포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인간의 잣대로 그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닥터 맨해튼에게 잔혹성이나 비도덕성은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코미디언이 경계를 넘나드는 인물이었다면, 닥터 맨해튼은 경계가 없는 인물인 셈이다. 그래서 오지맨디아스의 음모의 중심에서 철저히 도구로 활용될 수 있었고, 자신이 모든 죄를 덮어쓰는 것조차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오지맨디아스와 로어셰크의 차이가 정의에 관한 입장이 다른 것이었다면, 닥터 맨해튼은 정의에 관한 입장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가 미국을 돕고 인류번영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정의라 믿기 때문이 아니라 관습에 의해서다. 주체의 문제에서도 언급했듯이, 그가 만약 소련의 과학자였다면 그는 소련의 도구가 되었을 것이다. 오지맨디아스의 음모에 빠져 마지막 남은 인간으로서의 분노를 표출하고 닥터 맨해튼이 택하는 길은 화성행이다. 화성에서 그는 하나의 소우주를 창조하는데, 지구를 떠나기 전 그가 남기는 마지막 말도 복잡한 은하계를 떠나 새로운 곳에서 생명체를 만들어보려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그는 지구가 아닌 곳에선 생명체를 만들고 신으로 군림할 수 있지만, 인간이 사는 지구에선 인간성 상실의 상태론 영웅이 될 수 없다. 인성이 없다는 건, 자기극복의 대상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닥터 맨해튼은 자기극복이라는 명제가 애초에 성립이 되지 않는 캐릭터다.


무고한 수백만 명이 죽었고, 그것을 밝히려던 로어셰크마저도 죽었다. 비극적인 참사가 오지맨디아스의 계획으로 이루어졌다는 걸 모르는 시민들은 복구 작업을 선도하는 바이트 기업에 의지하게 될 것이다.(쇼트19) 붕괴된 도시를 복구하는 곳에 오지맨디아스 소유의 “바이트” 기업 이미지가 새겨진 비행선을 비추는 쇼트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폭력으로 유지됐던 예전의 영웅놀이가 새 시대엔 자본으로 유지될 것임을 암시하는 의도적 배치다. 물론 이대로 영화가 끝난다면 지독한 허무주의겠지만, “바이트”가 새겨진 비행선을 비추던 (쇼트19)는 커트되지 않고 아래 공간으로 내려간다. 엘리트 영웅이 지배한 하늘에서 소시민들이 사는 거리의 공간으로 내려온 것이다. 카메라 팔로우 하는 중간에 화면에 비치는 광고판엔 “당신의 마음은, 옳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In your hearts, you know it's right)”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쇼트20) 이것은 로어셰크가 모든 비밀을 기록해놓은 일기가 도착하는 신문사의 옥외 광고판이다. 이 문장에서 “당신”은 관객을 상징하고, 무엇이 “옳다는” 것인지는 로어셰크의 일기에 적힌 내용을 통해 판단하게 될 것이다. 오지맨디아스의 비밀은 결국 밝혀질 것이고 언젠가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로어셰크의 일기가 가지는 상징적 함의는 결국 이 모든 판단의 주체는 “옳다는” 걸 알고 있는 “당신”들의 연대, 즉 우리들의 집단지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는 마지막에 이런 희망의 장치를 심어놓음으로써 허무주의의 위험에서 벗어난다.


 쇼트19


 쇼트20


<왓치맨>은 결국 영웅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표출하는 영화다. 과연 이 시대에 영웅은 필요한가? 오히려 영웅이란 존재가 세상을 더 비참하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왓치맨>이 영웅이란 존재에 대한 개념을 부정한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복잡다단한 설정과 묘한 정서에 있다. 대체역사로 내러티브를 채웠기에 픽션이라고만 하기엔 시대적 맥락과 밀접히 닿아있고, 액션 스펙터클과 범죄자 처단의 묘사에서 발생하는 쾌감이 주제를 흐리는 면도 있다. 게다가 모든 원인과 결과가 영웅집단 내부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시민연대나 집단지성에 대한 새로운 시대의 가치를 끌어올 여지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마지막 로어셰크의 일기가 도착하는 희망적인 장면도 결국 영웅이 남긴 유산이다. 그래서 좀 더 자세히 정의하자면, <왓치맨>은 영웅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통해 영웅이란 개념 자체에 대한 재정립을 요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앞의 두 챕터에서 다룬 <다크나이트>와 <스파이더맨>의 경우, 하나의 영웅이 주체가 되어서 이야기를 끝까지 이끌어가고 순간이나마 집단지성이 발휘되는 장면을 직접적으로 묘사한다. 완벽한 픽션이기에 오히려 영웅과 대중은 병치되거나 은유와 상징을 통해 일치되는 순간이 생긴다. 반성하는 영웅 혹은 대중과 함께여야만 가치가 생기는 존재로의 변화를 포착하는 것이지 영웅이란 개념 자체를 파괴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왓치맨>은 ‘현대의 영웅’, 즉 시대의 변화가 원하는 영웅상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기보다 사람들이 근원적으로 가지고 있는 영웅에 대한 편견이나 오해를 불식시키고 ‘영웅의 개념’, 그 자체에 대한 발상의 전환을 요한다. 특히 <왓치맨>은 ‘영웅=리더’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2장에서 정의한 영웅성의 개념의 핵심, ‘스스로의 힘’과 ‘자기극복’이란 명제가 확대 적용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다. 특히 영웅성에 있어 ‘자기극복(자기희생)’의 개념은 쉽사리 확장되어 ‘집단극복(집단희생)’으로 확대 재생산 되는 경우가 많은데, 영화가 가장 경계하는 지점이 바로 그 부분이다. 그러한 잘못된 개념의 적용이 극단적으로 묘사된 케이스가 오지맨디아스가 수백만 명을 살상하는 사건이다. 이러한 오해가 이중적으로 위험한 이유는, 먼저 영웅이 이뤄낸 자기극복의 가치가 타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는 오만이고, 둘째, 그것이 의외로 쉽게 대중을 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웅이 선두에서 대중을 이끌어가는 구조는 전혀 이상적이지 않다. 자기극복을 통하지 않은 가치는 결코 자신의 몫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개인의 자기극복이 모여 집단극복이 이뤄지는 것이지, 영웅의 자기극복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오해하기 시작하면 영웅이 조직한 계획의 한낱 부속품으로 기능할 뿐이다. 그러한 대중주도에 일차적 목표를 두는 사람은 영웅이 아니다. 자기극복의 대상과 방법은 개인마다 다르게 적용되는 것이기에, 그것을 하나로 통합하여 이끌어 가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호도하는 것은 영웅성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왓치맨>이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동안의 영웅 개념에 대한 오해를 걷어내어 핵심만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앞서 다룬 두 작품과 마찬가지로 자기극복을 이루려고 끝없이 노력하는 개인들의 연대와 참여를 통한 집단지성의 발전으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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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칼슈레이 2011/02/26 09:47 # 답글

    오와 왓치맨을 분석하는분 오랜만에 뵙네요^^ 동지애가 느껴지는군요 저도 알렌무어정말 좋아해서요^^ 좋은글 잘보고갑니다~ 걸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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