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24일
<마더> Review - 히치콕의 세계에 초대된 엄마
장르는 진화한다. 장르는 다층적이고, 장르는 당대의 사회․문화적 상황에 영향을 받는다. 장르연구를 한다는 것은 이러한 모든 복합성을 분석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봉준호의 영화를 장르론으로 분석한다는 것은 굉장히 흥미로운 작업이다. 봉준호 영화의 연속적인 성공은 명백히 장르영화의 틀을 효과적으로 다룬 덕이다. 하지만 그의 영화가 상투적인 장르공식에만 머물렀다면 이렇게까지 주목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봉준호 영화에 대한 장르연구들은 대부분 장르비틀기 혹은 장르뒤섞기 분석에만 치중한 경향이 있다. 봉준호가 유달리 그런 지점을 영리하게 활용하는 감독이긴 하나, 그것이 그가 장르를 대하는 태도의 모든 것으로 분석되어져선 곤란하다. 더욱 중요하게 다뤄야 할 지점은 외양과 본질의 불일치라는 히치콕적 주제를 자신의 스타일로 완벽하게 변주해내는 능력이다. 스릴러의 외피를 쓰고 시대의 무능함과 선악의 모호함을 다룬 <살인의 추억>, 괴수영화의 외피를 쓰고 권력과 계급의 속성, 가족의 해체를 다룬 <괴물>. 두 작품의 알맹이와 많은 부분 겹쳐지면서, 가장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엄마와 섹스라는 소재까지 동시에 끌어들여 스릴러의 외피를 씌워 만든 것이 바로 <마더>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장르영화의 외피를 쓰고 항상 장르적 쾌감과는 다른 속내를 은밀하게 내비치는 작전을 펼친다. <마더>에선 그런 특징이 더욱 두드러지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히치콕이 현재의 한국을 배경으로 엄마와 섹스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면 이런 모양새를 띠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한국의 어머니상 김혜자와 꽃미남 스타 원빈을 캐스팅한 것도 그렇고, 한적한 시골 마을도 그렇고, 얼핏 보면 무리 없이 봉합되는 가운데 뜻밖의 엔딩이 있는 내러티브까지도 히치콕의 그림자가 드리워있다. 존 카웰티에 따르면 장르는 순환하고 그 순환은 문화역사의 자연스런 현상이다. 장르가 변형, 순환된다는 그의 주장엔 전적으로 수긍을 하나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점은 그 순환의 다양한 결과 중의 하나는 출발점으로의 귀결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히치콕 스릴러”를 하나의 장르로 분류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마더>는 분명히 히치콕 스릴러라는 장르의 시작점으로 회귀하는 작품이다.
키워드1 : 맥거핀
<마더>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이 영화의 요소요소가 맥거핀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파악해야 한다. 영화는 오프닝부터 노골적으로 맥거핀을 활용한다. ‘분위기 잡기’ 혹은 ‘호기심 유발’ 등으로 보이는 오프닝은 아무런 인과관계 없이 생뚱맞게 김혜자가 풀숲에서 춤을 추는 이미지만을 나열한다. 그렇게 인과관계가 없을 것 같던 오프닝이 영화의 절정 부분이 지나고 나서야 다시 등장하는데, 이것으로 인해 오프닝이 마치 후반부에 재등장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후반부에선 김혜자는 전혀 춤을 추지 않고 방금 살인을 마친 자신의 손을 들여다볼 뿐이다. 편집의 재미라고 볼 수도 있지만 내러티브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춤 장면을 굳이 오프닝에 삽입한 것은 명백히 맥거핀 효과를 노린 것이라 볼 수 있다. 재등장한 장면에서 춤을 추지 않는 김혜자를 보는 순간, 오프닝에서 보여진 김혜자의 춤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읽어내려던 노력은 순식간에 수포로 돌아간다. 하지만 다시 등장하지 않을 것 같았던 김혜자의 춤은 수미쌍관식으로 영화의 엔딩에 등장한다. 물론 “독무-군무”라는 차이점은 있지만 다시 한 번 김혜자의 춤이 등장하는 순간, 오프닝에 대한 의문이 다시금 환기되면서 춤에 내포된 의미는 무한히 확장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엔딩의 춤이 새로운 맥거핀의 시작이라는 혐의 또한 지울 수가 없다. 방금 예를 든 오프닝 장면뿐만 아니라 <마더>에는 이런 맥거핀을 이중삼중으로 깔아놓은 장면들이 수도 없이 많다. 봉준호는 맥거핀의 적극적인 활용을 통해 자신이 진심으로 하고 싶은 얘기를 사이사이에 교묘히 숨겨놓는다. 그가 너무 많이 심어놓은 맥거핀을 쫓는데 급급하다 보면 정작 이 영화가 무엇을 얘기하는지를 놓치기가 쉽다.
원빈의 친구, 진구를 진범으로 의심한 김혜자는 그의 집에 숨어들어서 결정적인 단서로 보이는 골프채를 훔쳐오지만, 해프닝으로 끝나고 만다. 밤에 귀가한 김혜자는 원빈의 방에서 태연히 컴퓨터를 하고 있는 진구를 만난다. 진구는 김혜자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자신을 의심했던 일을 추궁하는데, 이 장면은 성적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다. 진구가 복도로 나오며 김혜자에게 뱉는 대사와 행동들은 결코 일반적인 어머니와 아들 친구의 관계라고 볼 수는 없다. (그림1 - “왜 이렇게 늦었어”, “술도 많이 먹었네”) 둘의 관계는 그림2)에서 진구의 결정적인 대사, “그건 그렇고, 씨발 좆나게 섭섭하네.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가 내뱉어지는 순간 공고해지는 듯하다.


그림2)의 대사가 발현되는 순간, 진구는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남편(남성)으로 위치지어진다. 대사의 강렬함 때문에 모든 집중은 김혜자와 진구의 관계에 초점이 맞춰지지만, 진구가 합의금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순간부터 긴장감은 해제된다.(외견의 변화 : 탈의된 상의 - 상의 착용 / 호칭의 변화 : 너 - 어머니) 그 이후부터 진구는 살해된 문아정의 소문에 대해 김혜자에게 말해주며 적극적인 조력자 역할로 순식간에 돌변한다. 이 씬의 기능적인 측면을 분석하자면 명백히 국면전환을 위한 조력자의 정보제공을 위한 장면이다. 씬의 기능성을 넘어선 부가적 역할로써 캐릭터를 보여주는 것은 가능하지만,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정보(김혜자-진구 : 유사부부 관계추정)를 제공하면서 초점을 흐려놓는다. “엄마와 잔다”는 원빈의 대사가 빈번히 나오고, 김혜자와 진구의 관계에도 모종의 의심을 품게 만드는 등 ‘엄마와 섹스’라는 가장 다루기 힘든 조합을 지속적으로 전시하면서 집중력을 분산시킨다. 하지만 허탈하게도 그런 모든 암시와 상징들을 종합해봤자 결론은 나지 않는다. 외면적으로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엄마의 이야기”라는 스릴러로 읽히고, 내포적으로 “엄마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성적욕망”까지 내비치는 듯 보이나, <마더>의 서사는 영화가 끝나고 곱씹어볼수록 그 모든 구조 전체가 실은 맥거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렇다면 봉준호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영화의 후반부, 진범이 원빈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고물상 노인은 김혜자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풀숲 시퀀스를 지나, 바로 연결되는 장면이 진범이 잡혀서 원빈이 풀려난다는 소식을 전하러 온 윤제문의 등장이다. 이것은 마치 원빈이 풀려나는데 김혜자의 노력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김혜자가 한 것이라곤 마주대하기 싫은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우발성 살인을 저지른 것뿐이다.


여기서 고물상 노인을 죽인 것이 현실도피성 살인이라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김혜자는 영화에서 한 번의 살인(고물상 노인-그림3)과 한 번의 살인미수(아들-그림4)를 저지르는데, 두 번 모두 현실도피를 위한 행위였다는 점에서 기저의 욕망이 일치한다. 심지어 농약 탄 박카스로 아들을 죽이려던 김혜자의 행위는 내러티브가 전개될 때 도상화 되어 강조된다. 그림4)는 김혜자의 회상인지, 아닌지도 파악이 안 되게 잠깐 지나치는 쇼트이지만, 그 쇼트에서 보여주지 못한 나머지 행위를 극 초반부 원빈에게 보약을 먹이는 장면에서 채운다. 벽에 노상방뇨를 하고 있는 원빈에게 다가온 김혜자는 원빈이 싫다고 고개를 돌림에도 불구하고 괜찮다는 고갯짓과 함께 보약을 먹인다.(그림5) 다음 쇼트에서, 그 보약이 아무런 효과가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부감을 선택한다.(그림6-원빈의 입으로 들어가는 보약 : 바닥에 흘러내리는 오줌) 원빈이 자리를 떠난 후, 원빈의 오줌자국을 발로 문지르고 벽돌을 올려놓는 김혜자의 행위(그림7)는 표면적으로 아들의 치부를 덮기 위함으로 보이지만, 실은 김혜자가 스스로의 행위를 감추기 위함으로 보이기도 한다.(그림7의 화면 사이즈는 롱쇼트로, 김혜자가 하는 행위의 구체성을 감추는데 일조한다)



그림5, 6, 7
가만히 따져보면 김혜자의 모든 행동은 아들을 위한 어머니의 모성애라기 보단 철저히 개인의 욕망과 이기심으로부터 출발함을 알 수 있다. 결국 <마더>는 개인의 욕망이 얼마만큼 극대화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욕망대로만 사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 역설하는 영화다. 그런 속내를 가장 여실히 드러내는 장면이 바로 (앞서 설명한 보약 먹이는 장면과도 연결이 되는) 원빈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김혜자를 기억해냈음을 밝히는 면회씬이다. 원빈이 봉인된 기억을 끄집어내어 김혜자가 벌인 추악한 사건의 면모가 드러나는 순간, 내내 손으로 가리고 있던 원빈의 일그러진 반쪽 얼굴이 마저 드러난다.(그림 5-6) 야누스의 얼굴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감독이 노골적으로 이 장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장치인데다, 심지어 원빈의 발언에 대한 김혜자의 반응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매우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김혜자가 “근데 너 5살짜리가 어째 그걸 기억을 하니?”(그림7)라고 내뱉는 순간, <마더>는 스릴러도, 모성애도, 엄마+섹스도 아닌 인간의 욕망과 근원적인 이기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임을 알게 된다. 아들이 진실에 대면한 순간조차, 김혜자는 아들에 대한 속죄가 아닌 자신의 입장만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심지어 가까스로 찾은 아들의 기억마저도 침을 놓아서 지워주겠다고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들의 입장은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김혜자의 이기심은 [①농약 박카스 → 실패 → 사실 은폐 ②보약 → 오줌으로 방출 → 벽돌로 덮음 ③진실 밝혀짐 → 다시 은폐 유도]가 보여주듯이 아들과의 관계 속에서 무한히 반복됨을 알 수 있다. 영화 내내 김혜자가 하는 가장 강력한 행위들은 모두 자신에게 불리한 진실을 은폐하는 것이다. 문아정 살인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김혜자가, 그토록 원하던 진실을 밝혀준 고물상 노인을 죽인다는 아이러니의 극치를 절정에 배치함으로써, 애초에 영화는 진실을 밝히기 위한 여정이 아닌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여정이었음을 드러낸다. 봉준호는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장르, 캐릭터, 내러티브 전체를 맥거핀으로 활용한 것이다.



키워드2 : 오이디푸스 궤적
일종의 신화화된 영웅이야기로 고전 할리우드영화에서 흔히 보여지는 남성주인공의 위기와 이성과의 결합 과정은 흔히 “오이디푸스 궤적(Oedipal trajectory)”이라는 용어로 불려왔다. 물론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 오이디푸스 궤적에 실패한 남성주인공의 말로는 비참함 그 자체일 뿐이다.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는 필름누아르의 탐정들이나 카우보이들은 죽음의 나락으로 혹은 영원한 떠돌이의 운명으로 전락하고 만다. 오이디푸스 궤적과 관련하여 히치콕의 남자주인공들은 다른 감독의 주인공들과 비슷하면서도 확연히 구별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히치콕 영화의 남자주인공들은 대부분 과도한 거세공포증에 시달린다는 점이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사이코>다. <사이코>의 주인공 노먼 베이츠의 어머니는 죽어서도 해골이 된 채 지하에서 아들의 마음을 조종하고 결국에는 아들과 육체적, 심리적으로 한 몸이 된다. <레베카>의 로렌스 올리비에도 일종의 거세적 어머니인 가정부 댄버스 부인을 고용하고 있다. <새>에서 제시카 탠디가 분한 어머니도 살아 있긴 하지만 그 이미지는 <사이코>와 거의 유사하다. 이들 남성주인공의 대부분은 심리적 결함이 있는 여성들을 구원함으로써 자신의 남성성을 회복해 간다.
이런 측면에서 바라볼 때 <마더>가 흥미로운 지점은 거세공포증의 원인이 되는 “엄마”가 영화의 내러티브를 이끌어간다는 것이다. 히치콕의 영화에선 단 한 번도 엄마가 주인공인 경우는 없었다. 오이디푸스 궤적을 따라가기에 엄마라는 캐릭터는 애초에 자격요건 미달의 주인공인 셈이다. 하지만 <마더>에서 김혜자의 욕망은 히치콕 세계의 남자주인공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김혜자 역시 어떤 공포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근원적인 목표이기 때문이다. 김혜자가 가지고 있는 공포증이 어떻게 거세 공포증과 연결되는지를 살펴보자.
급전이 필요한 김혜자는 이웃인 전미선에게 침을 놓아주며 사정을 이야기한다. 이자 대신 “애 들어서는 약”을 지어주겠다며 회유를 하는데, 재밌는 점은 그들 사이의 대화에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일언반구 언급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영화 내내 전미선의 남편은 언급/출연하지 않고, 김혜자의 남편 역시 마찬가지다. <마더>의 세계에는 아버지가 없다.(심지어 살해당한 문아정 역시 아버지가 없다) 누군가의 아버지일 법한 캐릭터들(형사들, 변호사, 문아정과 원조교제한 남자들)은 모두 철저하게 무능력하다.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아야 거세공포증도 생길 터인데, 애초에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니 조건이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원빈은 시작부터 거세된 채로 존재한다.(바보-사회적 거세) <마더>에서, 주인공인 엄마의 아들이 거세된 채로 존재한다는 설정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설정으로 인해 <마더>의 김혜자와 원빈의 관계는, 히치콕 영화의 ‘남자주인공(거세공포증)-엄마(원인)’의 관계와 정확하게 일치하게 된다. 원빈은 김혜자의 상징적인 남근으로 위치지어지고, 영화는 아들(남근)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거세공포증)을 극복하는 엄마(히치콕 세계의 남자주인공)의 서사로 자리매김한다. 히치콕 영화의 남자주인공들이 어머니에게 느끼는 애증(낳아주신 어머니-거세공포증의 원인)의 감정은, 김혜자가 원빈에게 느끼는 감정과 동일하다.(낳은 아들-은폐된 진실의 소유자) 하지만 김혜자가 히치콕의 남자주인공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바보 아들(상징적 남근)이 거세의 위협으로부터 지켜내야 할 대상인 동시에, 위험을 가중하는 방해꾼 역할도 함께 맡는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누가 누굴 지키는 것인지, 보호와 위협의 경계는 어디인지 등, 모든 경계가 무너짐을 느끼게 된다.
이런 식의 위치전복은 <마더>의 내러티브에서 자주 일어난다. 김혜자는 잡힌 진범(실은 진범이 아닌)을 확인하고 싶어서 형사를 따라나선다. 진범인 종팔이의 좋지 않은 상태를 보고 비탄에 빠진 김혜자는 “엄마 없어?”라고 묻곤 눈물을 흘리는데, 이때 종팔이는 “울지 마라”고 김혜자를 위로해준다. 바보 아들을 구하기 위해 대신 감옥에 들어가야 하는 대상이 바보보다 더 좋지 않은 상태라는 것, 게다가 그런 그에게 위로까지 받는 상황은 김혜자 뿐만이 아니라 내러티브가 진행되는 동안 모종의 공범이 되어버린 관객까지도 죄책감을 들게 만든다. 김혜자가 뱉은 “엄마 없어?”라는 대사는, 원빈보다 상태가 좋지 않은 종팔이의 주변에는 왜 자신처럼 이기적으로 굴어줄 사람조차 없는지에 대한 원망의 외침처럼 들린다. 하지만 모두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왜냐면, 문아정과의 즐거운 한때를 보냈던 과거에나, 김혜자를 위로하는 장면에서나 행복해 보이는 건(혹은 추측되는 건) 오직 종팔이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봉준호는 김혜자와 종팔이의 만남에 희망의 단초를 심어놓았다.



종팔이는 포커스 아웃된 상태로 방에 들어와 포커스 인 되면서 다운증후군임이 밝혀진다.(그림11) 자신의 아들보다 훨씬 상태가 안 좋은 종팔이의 모습을 본 김혜자는 그동안 이기적으로 굴었던 자신의 모든 행동이 결국 이런 아이를 진범으로 몰아넣었다는 생각에 진심어린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그림12) 김혜자가 영화상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흘린 이 눈물은, 이기적 행동에 대한 깊은 후회를 내포하는 것이다. 김혜자는 어떤 상황에 처해도 울지 않았다. 영화 내내 김혜자 캐릭터에게 후회(혹은 반성)라는 감정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다. 심지어 원빈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장면에서조차도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캐릭터였다. 그림12)의 눈물은 김혜자 캐릭터의 성장이라는 함의가 담긴 장면이다. 게다가 이 상황을 거리를 두고 멀리서 지켜보게끔 만드는 쇼트(그림13)가 씬의 마지막에 배치되면서, 이기적 행동에 대한 결과와 후회, 반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든다.
이러한 교훈은 엔딩시퀀스에서 다시 한 번 강조된다. 동네 아줌마들과 함께 관광을 떠나기 전 버스터미널에서 김혜자․원빈 모자는 잠깐의 시간을 갖는다. 원빈은 가는 길에 심심하지 말라고 주전부리를 사주는데, 그때 김혜자가 살인현장에 흘린 침구통도 함께 넘겨준다.(그림14) 영화에서 원빈이 바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만드는 장면이 여럿 나오는데, 침구통을 돌려주는 이 장면이 가장 큰 의심을 사게 한다. 거세된 남근의 역할을 해줄 뿐이라고 생각했던 원빈 캐릭터가 실은 극의 중심에 서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원빈이 바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들게끔 만드는 표면적인 반전을 넘어서서, 우리는 김혜자의 반응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몹쓸 것이라도 봤다는 표정을 짓는 이 장면에서, 종팔이와의 만남을 통해 성장한 김혜자의 캐릭터가 더 이상 이런 부조리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이기심으로 모든 걸 은폐하지 못하고 심정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버스씬에서 이러한 교훈은 다시 한 번 전복된다. 모든 아줌마들이 광란의 댄스타임을 벌이고 있을 때, 김혜자만 홀로 좌석에 앉아 침구통을 들여다본다. 통에서 침을 하나 꺼낸 김혜자는 곧 허벅지에 침을 한방 놓는데,(그림16) 그 침자리는 원빈에게 놓아주려 했던 “나쁜 일, 끔찍한 일”을 싹 잊게 해준다는 신비의 침자리다. 성장하는 캐릭터로 보였던 김혜자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여 돌파하기보다는 스스로 만들어낸 미신에 의지하는 캐릭터로 전락하고 만다. 침 한방에 모든 근심걱정을 잊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김혜자가 신비의 침자리에 침을 놓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이기심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걸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침을 놓고 나서 마치 모든 근심걱정을 털어냈다는 듯이 아줌마들과 어울려 격정적인 춤을 추는 김혜자는, 흔들리는 버스에 역광을 배경으로 다른 아줌마들과 피아식별이 되지 않으면서 점점 사라져간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고 캐릭터는 원점으로 돌아왔다.(오프닝-김혜자의 독무 : 엔딩-김혜자가 포함된 군무) 후회와 반성을 배우게 된 캐릭터라는 희망의 단초를 채 즐기기도 전에 이런 반전을 드러내면서, 영화는 끝나기 전까지 단 1분의 여유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히치콕이 보여준 완벽하게 꽉 짜여진 연출의 묘를 보는 기분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장르는 결과이자 과정이다. 봉준호의 전작(全作)은 영화장르의 계승이자 변주의 역사를 보여주는 하나의 유기체였다. 주로 스릴러에 뼈대를 두고 있지만, 그 안에서 봉준호가 보여주려 했던 주제나 소재는 늘 변화․발전하였다. 관객들에게 장르적 쾌감을 안겨주면서(동시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은밀히 깔아놓으면서) 엄청난 흥행성공을 이루었던 <살인의 추억> <괴물>은 그런 점에서 이견의 여지없는 성공작이었다. 하지만 <마더>는 전작들과 궤를 약간 달리하는 작품이다. 여전히 그는 장르적 재미를 추구하고 장르관습을 손아귀에 놓고 노는 듯 보이지만, <마더>는 봉준호의 진심이 조금 더 은밀하게, 혹은(눈치 빠른 관객들에겐)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적 완성도를 넘어서는 ‘작가’로서의 욕심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욕심 때문에, 그가 의도한 바건 아니건 <마더>엔 히치콕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마더> 한 작품만 높고 보자면, 아직까진 히치콕처럼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서 동시에 엄청난 영화적 재미를 주는 경지에까지 이르진 못했지만,(그것은 전작과 비교했을 때 부진한 흥행 성적이 증명한다) 한국에서 히치콕 같은, 아니 히치콕을 넘어서는 감독이 탄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히치콕은 세계영화사에서 스릴러 장르를 가장 잘 다룬 감독이었다. 한국에서 스릴러 장르를 가장 잘 다루는 봉준호가 히치콕 세계로 진입하는 것은 사실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다음 작품부터는 히치콕마저 넘어선 봉준호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by | 2009/11/24 02:50 | 트랙백 | 덧글(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