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Review - 히치콕의 세계에 초대된 엄마

 

장르는 진화한다. 장르는 다층적이고, 장르는 당대의 사회․문화적 상황에 영향을 받는다. 장르연구를 한다는 것은 이러한 모든 복합성을 분석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봉준호의 영화를 장르론으로 분석한다는 것은 굉장히 흥미로운 작업이다. 봉준호 영화의 연속적인 성공은 명백히 장르영화의 틀을 효과적으로 다룬 덕이다. 하지만 그의 영화가 상투적인 장르공식에만 머물렀다면 이렇게까지 주목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봉준호 영화에 대한 장르연구들은 대부분 장르비틀기 혹은 장르뒤섞기 분석에만 치중한 경향이 있다. 봉준호가 유달리 그런 지점을 영리하게 활용하는 감독이긴 하나, 그것이 그가 장르를 대하는 태도의 모든 것으로 분석되어져선 곤란하다. 더욱 중요하게 다뤄야 할 지점은 외양과 본질의 불일치라는 히치콕적 주제를 자신의 스타일로 완벽하게 변주해내는 능력이다. 스릴러의 외피를 쓰고 시대의 무능함과 선악의 모호함을 다룬 <살인의 추억>, 괴수영화의 외피를 쓰고 권력과 계급의 속성, 가족의 해체를 다룬 <괴물>. 두 작품의 알맹이와 많은 부분 겹쳐지면서, 가장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엄마와 섹스라는 소재까지 동시에 끌어들여 스릴러의 외피를 씌워 만든 것이 바로 <마더>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장르영화의 외피를 쓰고 항상 장르적 쾌감과는 다른 속내를 은밀하게 내비치는 작전을 펼친다. <마더>에선 그런 특징이 더욱 두드러지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히치콕이 현재의 한국을 배경으로 엄마와 섹스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면 이런 모양새를 띠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한국의 어머니상 김혜자와 꽃미남 스타 원빈을 캐스팅한 것도 그렇고, 한적한 시골 마을도 그렇고, 얼핏 보면 무리 없이 봉합되는 가운데 뜻밖의 엔딩이 있는 내러티브까지도 히치콕의 그림자가 드리워있다. 존 카웰티에 따르면 장르는 순환하고 그 순환은 문화역사의 자연스런 현상이다. 장르가 변형, 순환된다는 그의 주장엔 전적으로 수긍을 하나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점은 그 순환의 다양한 결과 중의 하나는 출발점으로의 귀결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히치콕 스릴러”를 하나의 장르로 분류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마더>는 분명히 히치콕 스릴러라는 장르의 시작점으로 회귀하는 작품이다. 

키워드1 : 맥거핀

<마더>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이 영화의 요소요소가 맥거핀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파악해야 한다. 영화는 오프닝부터 노골적으로 맥거핀을 활용한다. ‘분위기 잡기’ 혹은 ‘호기심 유발’ 등으로 보이는 오프닝은 아무런 인과관계 없이 생뚱맞게 김혜자가 풀숲에서 춤을 추는 이미지만을 나열한다. 그렇게 인과관계가 없을 것 같던 오프닝이 영화의 절정 부분이 지나고 나서야 다시 등장하는데, 이것으로 인해 오프닝이 마치 후반부에 재등장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후반부에선 김혜자는 전혀 춤을 추지 않고 방금 살인을 마친 자신의 손을 들여다볼 뿐이다. 편집의 재미라고 볼 수도 있지만 내러티브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춤 장면을 굳이 오프닝에 삽입한 것은 명백히 맥거핀 효과를 노린 것이라 볼 수 있다. 재등장한 장면에서 춤을 추지 않는 김혜자를 보는 순간, 오프닝에서 보여진 김혜자의 춤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읽어내려던 노력은 순식간에 수포로 돌아간다. 하지만 다시 등장하지 않을 것 같았던 김혜자의 춤은 수미쌍관식으로 영화의 엔딩에 등장한다. 물론 “독무-군무”라는 차이점은 있지만 다시 한 번 김혜자의 춤이 등장하는 순간, 오프닝에 대한 의문이 다시금 환기되면서 춤에 내포된 의미는 무한히 확장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엔딩의 춤이 새로운 맥거핀의 시작이라는 혐의 또한 지울 수가 없다. 방금 예를 든 오프닝 장면뿐만 아니라 <마더>에는 이런 맥거핀을 이중삼중으로 깔아놓은 장면들이 수도 없이 많다. 봉준호는 맥거핀의 적극적인 활용을 통해 자신이 진심으로 하고 싶은 얘기를 사이사이에 교묘히 숨겨놓는다. 그가 너무 많이 심어놓은 맥거핀을 쫓는데 급급하다 보면 정작 이 영화가 무엇을 얘기하는지를 놓치기가 쉽다.


원빈의 친구, 진구를 진범으로 의심한 김혜자는 그의 집에 숨어들어서 결정적인 단서로 보이는 골프채를 훔쳐오지만, 해프닝으로 끝나고 만다. 밤에 귀가한 김혜자는 원빈의 방에서 태연히 컴퓨터를 하고 있는 진구를 만난다. 진구는 김혜자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자신을 의심했던 일을 추궁하는데, 이 장면은 성적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다. 진구가 복도로 나오며 김혜자에게 뱉는 대사와 행동들은 결코 일반적인 어머니와 아들 친구의 관계라고 볼 수는 없다. (그림1 - “왜 이렇게 늦었어”, “술도 많이 먹었네”) 둘의 관계는 그림2)에서 진구의 결정적인 대사, “그건 그렇고, 씨발 좆나게 섭섭하네.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가 내뱉어지는 순간 공고해지는 듯하다.


 그림1, 2

 

그림2)의 대사가 발현되는 순간, 진구는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남편(남성)으로 위치지어진다. 대사의 강렬함 때문에 모든 집중은 김혜자와 진구의 관계에 초점이 맞춰지지만, 진구가 합의금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순간부터 긴장감은 해제된다.(외견의 변화 : 탈의된 상의 - 상의 착용 / 호칭의 변화 : 너 - 어머니) 그 이후부터 진구는 살해된 문아정의 소문에 대해 김혜자에게 말해주며 적극적인 조력자 역할로 순식간에 돌변한다. 이 씬의 기능적인 측면을 분석하자면 명백히 국면전환을 위한 조력자의 정보제공을 위한 장면이다. 씬의 기능성을 넘어선 부가적 역할로써 캐릭터를 보여주는 것은 가능하지만,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정보(김혜자-진구 : 유사부부 관계추정)를 제공하면서 초점을 흐려놓는다. “엄마와 잔다”는 원빈의 대사가 빈번히 나오고, 김혜자와 진구의 관계에도 모종의 의심을 품게 만드는 등 ‘엄마와 섹스’라는 가장 다루기 힘든 조합을 지속적으로 전시하면서 집중력을 분산시킨다. 하지만 허탈하게도 그런 모든 암시와 상징들을 종합해봤자 결론은 나지 않는다. 외면적으로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엄마의 이야기”라는 스릴러로 읽히고, 내포적으로 “엄마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성적욕망”까지 내비치는 듯 보이나, <마더>의 서사는 영화가 끝나고 곱씹어볼수록 그 모든 구조 전체가 실은 맥거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렇다면 봉준호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영화의 후반부, 진범이 원빈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고물상 노인은 김혜자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풀숲 시퀀스를 지나, 바로 연결되는 장면이 진범이 잡혀서 원빈이 풀려난다는 소식을 전하러 온 윤제문의 등장이다. 이것은 마치 원빈이 풀려나는데 김혜자의 노력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김혜자가 한 것이라곤 마주대하기 싫은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우발성 살인을 저지른 것뿐이다.


 그림3, 4

 

여기서 고물상 노인을 죽인 것이 현실도피성 살인이라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김혜자는 영화에서 한 번의 살인(고물상 노인-그림3)과 한 번의 살인미수(아들-그림4)를 저지르는데, 두 번 모두 현실도피를 위한 행위였다는 점에서 기저의 욕망이 일치한다. 심지어 농약 탄 박카스로 아들을 죽이려던 김혜자의 행위는 내러티브가 전개될 때 도상화 되어 강조된다. 그림4)는 김혜자의 회상인지, 아닌지도 파악이 안 되게 잠깐 지나치는 쇼트이지만, 그 쇼트에서 보여주지 못한 나머지 행위를 극 초반부 원빈에게 보약을 먹이는 장면에서 채운다. 벽에 노상방뇨를 하고 있는 원빈에게 다가온 김혜자는 원빈이 싫다고 고개를 돌림에도 불구하고 괜찮다는 고갯짓과 함께 보약을 먹인다.(그림5) 다음 쇼트에서, 그 보약이 아무런 효과가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부감을 선택한다.(그림6-원빈의 입으로 들어가는 보약 : 바닥에 흘러내리는 오줌) 원빈이 자리를 떠난 후, 원빈의 오줌자국을 발로 문지르고 벽돌을 올려놓는 김혜자의 행위(그림7)는 표면적으로 아들의 치부를 덮기 위함으로 보이지만, 실은 김혜자가 스스로의 행위를 감추기 위함으로 보이기도 한다.(그림7의 화면 사이즈는 롱쇼트로, 김혜자가 하는 행위의 구체성을 감추는데 일조한다)



 그림5, 6, 7

 

가만히 따져보면 김혜자의 모든 행동은 아들을 위한 어머니의 모성애라기 보단 철저히 개인의 욕망과 이기심으로부터 출발함을 알 수 있다. 결국 <마더>는 개인의 욕망이 얼마만큼 극대화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욕망대로만 사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 역설하는 영화다. 그런 속내를 가장 여실히 드러내는 장면이 바로 (앞서 설명한 보약 먹이는 장면과도 연결이 되는) 원빈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김혜자를 기억해냈음을 밝히는 면회씬이다. 원빈이 봉인된 기억을 끄집어내어 김혜자가 벌인 추악한 사건의 면모가 드러나는 순간, 내내 손으로 가리고 있던 원빈의 일그러진 반쪽 얼굴이 마저 드러난다.(그림 5-6) 야누스의 얼굴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감독이 노골적으로 이 장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장치인데다, 심지어 원빈의 발언에 대한 김혜자의 반응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매우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김혜자가 “근데 너 5살짜리가 어째 그걸 기억을 하니?”(그림7)라고 내뱉는 순간, <마더>는 스릴러도, 모성애도, 엄마+섹스도 아닌 인간의 욕망과 근원적인 이기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임을 알게 된다. 아들이 진실에 대면한 순간조차, 김혜자는 아들에 대한 속죄가 아닌 자신의 입장만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심지어 가까스로 찾은 아들의 기억마저도 침을 놓아서 지워주겠다고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들의 입장은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김혜자의 이기심은 [①농약 박카스 → 실패 → 사실 은폐 ②보약 → 오줌으로 방출 → 벽돌로 덮음 ③진실 밝혀짐 → 다시 은폐 유도]가 보여주듯이 아들과의 관계 속에서 무한히 반복됨을 알 수 있다. 영화 내내 김혜자가 하는 가장 강력한 행위들은 모두 자신에게 불리한 진실을 은폐하는 것이다. 문아정 살인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김혜자가, 그토록 원하던 진실을 밝혀준 고물상 노인을 죽인다는 아이러니의 극치를 절정에 배치함으로써, 애초에 영화는 진실을 밝히기 위한 여정이 아닌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여정이었음을 드러낸다. 봉준호는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장르, 캐릭터, 내러티브 전체를 맥거핀으로 활용한 것이다.


 그림8, 9, 10

 

키워드2 : 오이디푸스 궤적

일종의 신화화된 영웅이야기로 고전 할리우드영화에서 흔히 보여지는 남성주인공의 위기와 이성과의 결합 과정은 흔히 “오이디푸스 궤적(Oedipal trajectory)”이라는 용어로 불려왔다. 물론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 오이디푸스 궤적에 실패한 남성주인공의 말로는 비참함 그 자체일 뿐이다.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는 필름누아르의 탐정들이나 카우보이들은 죽음의 나락으로 혹은 영원한 떠돌이의 운명으로 전락하고 만다. 오이디푸스 궤적과 관련하여 히치콕의 남자주인공들은 다른 감독의 주인공들과 비슷하면서도 확연히 구별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히치콕 영화의 남자주인공들은 대부분 과도한 거세공포증에 시달린다는 점이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사이코>다. <사이코>의 주인공 노먼 베이츠의 어머니는 죽어서도 해골이 된 채 지하에서 아들의 마음을 조종하고 결국에는 아들과 육체적, 심리적으로 한 몸이 된다. <레베카>의 로렌스 올리비에도 일종의 거세적 어머니인 가정부 댄버스 부인을 고용하고 있다. <새>에서 제시카 탠디가 분한 어머니도 살아 있긴 하지만 그 이미지는 <사이코>와 거의 유사하다. 이들 남성주인공의 대부분은 심리적 결함이 있는 여성들을 구원함으로써 자신의 남성성을 회복해 간다.


이런 측면에서 바라볼 때 <마더>가 흥미로운 지점은 거세공포증의 원인이 되는 “엄마”가 영화의 내러티브를 이끌어간다는 것이다. 히치콕의 영화에선 단 한 번도 엄마가 주인공인 경우는 없었다. 오이디푸스 궤적을 따라가기에 엄마라는 캐릭터는 애초에 자격요건 미달의 주인공인 셈이다. 하지만 <마더>에서 김혜자의 욕망은 히치콕 세계의 남자주인공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김혜자 역시 어떤 공포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근원적인 목표이기 때문이다. 김혜자가 가지고 있는 공포증이 어떻게 거세 공포증과 연결되는지를 살펴보자.


급전이 필요한 김혜자는 이웃인 전미선에게 침을 놓아주며 사정을 이야기한다. 이자 대신 “애 들어서는 약”을 지어주겠다며 회유를 하는데, 재밌는 점은 그들 사이의 대화에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일언반구 언급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영화 내내 전미선의 남편은 언급/출연하지 않고, 김혜자의 남편 역시 마찬가지다. <마더>의 세계에는 아버지가 없다.(심지어 살해당한 문아정 역시 아버지가 없다) 누군가의 아버지일 법한 캐릭터들(형사들, 변호사, 문아정과 원조교제한 남자들)은 모두 철저하게 무능력하다.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아야 거세공포증도 생길 터인데, 애초에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니 조건이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원빈은 시작부터 거세된 채로 존재한다.(바보-사회적 거세) <마더>에서, 주인공인 엄마의 아들이 거세된 채로 존재한다는 설정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설정으로 인해 <마더>의 김혜자와 원빈의 관계는, 히치콕 영화의 ‘남자주인공(거세공포증)-엄마(원인)’의 관계와 정확하게 일치하게 된다. 원빈은 김혜자의 상징적인 남근으로 위치지어지고, 영화는 아들(남근)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거세공포증)을 극복하는 엄마(히치콕 세계의 남자주인공)의 서사로 자리매김한다. 히치콕 영화의 남자주인공들이 어머니에게 느끼는 애증(낳아주신 어머니-거세공포증의 원인)의 감정은, 김혜자가 원빈에게 느끼는 감정과 동일하다.(낳은 아들-은폐된 진실의 소유자) 하지만 김혜자가 히치콕의 남자주인공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바보 아들(상징적 남근)이 거세의 위협으로부터 지켜내야 할 대상인 동시에, 위험을 가중하는 방해꾼 역할도 함께 맡는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누가 누굴 지키는 것인지, 보호와 위협의 경계는 어디인지 등, 모든 경계가 무너짐을 느끼게 된다.


이런 식의 위치전복은 <마더>의 내러티브에서 자주 일어난다. 김혜자는 잡힌 진범(실은 진범이 아닌)을 확인하고 싶어서 형사를 따라나선다. 진범인 종팔이의 좋지 않은 상태를 보고 비탄에 빠진 김혜자는 “엄마 없어?”라고 묻곤 눈물을 흘리는데, 이때 종팔이는 “울지 마라”고 김혜자를 위로해준다. 바보 아들을 구하기 위해 대신 감옥에 들어가야 하는 대상이 바보보다 더 좋지 않은 상태라는 것, 게다가 그런 그에게 위로까지 받는 상황은 김혜자 뿐만이 아니라 내러티브가 진행되는 동안 모종의 공범이 되어버린 관객까지도 죄책감을 들게 만든다. 김혜자가 뱉은 “엄마 없어?”라는 대사는, 원빈보다 상태가 좋지 않은 종팔이의 주변에는 왜 자신처럼 이기적으로 굴어줄 사람조차 없는지에 대한 원망의 외침처럼 들린다. 하지만 모두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왜냐면, 문아정과의 즐거운 한때를 보냈던 과거에나, 김혜자를 위로하는 장면에서나 행복해 보이는 건(혹은 추측되는 건) 오직 종팔이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봉준호는 김혜자와 종팔이의 만남에 희망의 단초를 심어놓았다.


 그림11, 12, 13

 

종팔이는 포커스 아웃된 상태로 방에 들어와 포커스 인 되면서 다운증후군임이 밝혀진다.(그림11) 자신의 아들보다 훨씬 상태가 안 좋은 종팔이의 모습을 본 김혜자는 그동안 이기적으로 굴었던 자신의 모든 행동이 결국 이런 아이를 진범으로 몰아넣었다는 생각에 진심어린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그림12) 김혜자가 영화상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흘린 이 눈물은, 이기적 행동에 대한 깊은 후회를 내포하는 것이다. 김혜자는 어떤 상황에 처해도 울지 않았다. 영화 내내 김혜자 캐릭터에게 후회(혹은 반성)라는 감정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다. 심지어 원빈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장면에서조차도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캐릭터였다. 그림12)의 눈물은 김혜자 캐릭터의 성장이라는 함의가 담긴 장면이다. 게다가 이 상황을 거리를 두고 멀리서 지켜보게끔 만드는 쇼트(그림13)가 씬의 마지막에 배치되면서, 이기적 행동에 대한 결과와 후회, 반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든다.     


이러한 교훈은 엔딩시퀀스에서 다시 한 번 강조된다. 동네 아줌마들과 함께 관광을 떠나기 전 버스터미널에서 김혜자․원빈 모자는 잠깐의 시간을 갖는다. 원빈은 가는 길에 심심하지 말라고 주전부리를 사주는데, 그때 김혜자가 살인현장에 흘린 침구통도 함께 넘겨준다.(그림14) 영화에서 원빈이 바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만드는 장면이 여럿 나오는데, 침구통을 돌려주는 이 장면이 가장 큰 의심을 사게 한다. 거세된 남근의 역할을 해줄 뿐이라고 생각했던 원빈 캐릭터가 실은 극의 중심에 서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원빈이 바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들게끔 만드는 표면적인 반전을 넘어서서, 우리는 김혜자의 반응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몹쓸 것이라도 봤다는 표정을 짓는 이 장면에서, 종팔이와의 만남을 통해 성장한 김혜자의 캐릭터가 더 이상 이런 부조리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이기심으로 모든 걸 은폐하지 못하고 심정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그림14, 15, 16

 

하지만 마지막 버스씬에서 이러한 교훈은 다시 한 번 전복된다. 모든 아줌마들이 광란의 댄스타임을 벌이고 있을 때, 김혜자만 홀로 좌석에 앉아 침구통을 들여다본다. 통에서 침을 하나 꺼낸 김혜자는 곧 허벅지에 침을 한방 놓는데,(그림16) 그 침자리는 원빈에게 놓아주려 했던 “나쁜 일, 끔찍한 일”을 싹 잊게 해준다는 신비의 침자리다. 성장하는 캐릭터로 보였던 김혜자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여 돌파하기보다는 스스로 만들어낸 미신에 의지하는 캐릭터로 전락하고 만다. 침 한방에 모든 근심걱정을 잊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김혜자가 신비의 침자리에 침을 놓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이기심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걸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침을 놓고 나서 마치 모든 근심걱정을 털어냈다는 듯이 아줌마들과 어울려 격정적인 춤을 추는 김혜자는, 흔들리는 버스에 역광을 배경으로 다른 아줌마들과 피아식별이 되지 않으면서 점점 사라져간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고 캐릭터는 원점으로 돌아왔다.(오프닝-김혜자의 독무 : 엔딩-김혜자가 포함된 군무) 후회와 반성을 배우게 된 캐릭터라는 희망의 단초를 채 즐기기도 전에 이런 반전을 드러내면서, 영화는 끝나기 전까지 단 1분의 여유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히치콕이 보여준 완벽하게 꽉 짜여진 연출의 묘를 보는 기분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장르는 결과이자 과정이다. 봉준호의 전작(全作)은 영화장르의 계승이자 변주의 역사를 보여주는 하나의 유기체였다. 주로 스릴러에 뼈대를 두고 있지만, 그 안에서 봉준호가 보여주려 했던 주제나 소재는 늘 변화․발전하였다. 관객들에게 장르적 쾌감을 안겨주면서(동시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은밀히 깔아놓으면서) 엄청난 흥행성공을 이루었던 <살인의 추억> <괴물>은 그런 점에서 이견의 여지없는 성공작이었다. 하지만 <마더>는 전작들과 궤를 약간 달리하는 작품이다. 여전히 그는 장르적 재미를 추구하고 장르관습을 손아귀에 놓고 노는 듯 보이지만, <마더>는 봉준호의 진심이 조금 더 은밀하게, 혹은(눈치 빠른 관객들에겐)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적 완성도를 넘어서는 ‘작가’로서의 욕심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욕심 때문에, 그가 의도한 바건 아니건 <마더>엔 히치콕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마더> 한 작품만 높고 보자면, 아직까진 히치콕처럼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서 동시에 엄청난 영화적 재미를 주는 경지에까지 이르진 못했지만,(그것은 전작과 비교했을 때 부진한 흥행 성적이 증명한다) 한국에서 히치콕 같은, 아니 히치콕을 넘어서는 감독이 탄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히치콕은 세계영화사에서 스릴러 장르를 가장 잘 다룬 감독이었다. 한국에서 스릴러 장르를 가장 잘 다루는 봉준호가 히치콕 세계로 진입하는 것은 사실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다음 작품부터는 히치콕마저 넘어선 봉준호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by 끝까지 | 2009/11/24 02:50 | 트랙백 | 덧글(0)

"박찬욱" 감독론 - 박감독의 은밀한 변태성

“박찬욱”하면 떠오르는 화두는 주로 복수, 기독교적 구원, 물리적 잔혹성 등이다. 특히 이러한 주제들이 잘 녹아있었던 작품으로 “복수 3부작”이 있다. 복수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친절한 금자씨>를 끝으로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화두가 동시에 나오는 작품은 아직까진 없는 듯하다. 나는 복수 3부작을 관통하는 이러한 화두에 한 가지를 더 얹으려 한다. 그것은 “변태성”이다. 사실 저널이나 에세이에서 박찬욱을 다룰 땐 이 변태성 측면을 드러내놓고 표현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냥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한 징후나 스타일의 한 부분으로 뭉뚱그리는데, 나는 이러한 변태적 성향이 드러나는 장면들을 분석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접근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이런 식의 접근이 활성화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박찬욱이 굉장히 세련된 방법으로 그러한 변태성을 숨기거나 은밀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박찬욱의 변태성은 늘 폭력성과 함께 제시되는 측면이 있어서 보통 시각적으로 더 강렬한 물리적 잔혹성에 변태성이 가리는 경향이 있다. 현실에서 쉽게 다루기 힘든 “섹스”와 “폭력”을 인간의 본능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예술이라는 제한된 틀 내에서나마 솔직하게 다루려는 것은 비단 박찬욱 뿐만이 아니라 각종 예술매체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져 내려온 하나의 전통이다. 특히 영화는 시청각적으로 재현의 현실성이 가장 뛰어난 매체이기에 그런 주제와 소재를 작가가 표현하는 것도, 관객이 받아들이는 것도 다른 매체에 비하면 감각적이고 즉각적이 되기 쉽다. 한국영화라는 범위 안에서만 놓고 봤을 때, 박찬욱은 그런 측면을 가장 교묘하게 활용할 줄 아는 감독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의 작품 세계에서 성애(성욕), 특이 이상성애(이상성욕)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분석하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에 포착된 근친상간의 상징적 장면들과 페티시즘, 사디즘/마조히즘이 드러난 장면들을 분석하여 변태성을 드러낼 것이다.

     

먼저 “변태”라는 단어가 다양하고 일상적으로 쓰이는 의미들과 혼용될 우려가 있기에 사전적 정의의 두 가지 항목에 국한시키겠다. (“변태(變態)” [명사] : 2. 정상이 아닌 상태로 달라짐. 또는 그 상태 / 5. <심리> 정상이 아닌 성욕이나 그로 인한 행위. 또는 그 성욕을 가졌거나 그 행위를 하는 사람)


작품에 드러난 근친상간과 페티시즘[fetishism](인격체가 아닌 물건이나 특정 신체 부위 등에서 성적 만족감을 얻으려는 경향. 원시 신앙 중 하나인 주물숭배와 비슷한 현상. 성적 도착증의 하나로 분류) 그리고 사디즘[sadism](성적 대상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성적인 쾌감을 얻는 이상 성행위. 가학증 또는 학대음란증이라고 한다. 프랑스의 문학가 사드에서 유래된 명칭. 고통을 받음으로써 성적 쾌감을 얻게 되는 마조히즘과 대응. 심층심리학의 시조인 프로이트는 모든 생리적 기능에는 사디즘이 숨어 있으며 마조히즘은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사디즘이라고 말했다. 때로는 성목표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공격적이며 고통을 주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경향을 가리킬 때도 있음) / 마조히즘[masochism](이성으로부터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학대를 받고 고통을 받음으로써 성적 만족을 느끼는 병적인 심리상태. 오스트리아의 작가 자허마조흐가 이와 같은 변태적 성격의 소유자로서 이런 경향의 테마로 작품을 쓴 데서 유래. 흔히 남녀 간의 성적 행위에서 서로가 가벼운 고통을 주고받거나 함으로써 성적 흥분을 높이는 일이 적지 않으나 마조히즘 ·사디즘의 경우는 정도가 심한 상태를 말함. 따라서 변태성욕을 가리키는 말임. 대체로 성행위에서 남성이 사디즘의 경향을 나타내고, 여성이 마조히즘의 경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으며, 심한 경우는 매질 또는 흉기나 부젓가락에 의한 폭행 ·상해를 주고받거나, 그 밖에도 상대방에게 노예적으로 굴종함으로써 성적 쾌감을 느낌)의 징후들을 중점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화두1 : 근친상간

근친상간이 중요한 소재이자 반전으로 쓰이고 내러티브의 숨겨진 중심축으로 작용하는 <올드보이>의 노골적으로 표현된 근친상간 장면을 제외하더라도, <복수는 나의 것>(이하 <복수>) 역시 근친상간을 상징적으로 암시하는 장면이 많다. <복수>는 난치병에 걸린 누나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빈민층 노동자 류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류는 아픈 누나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는데, 이 보살핌의 경계가 가족애인지 근친상간인지 모호해지는 뉘앙스의 장면들이 있다. 각종 소음과 신음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져서 누나가 잠을 못자는 장면에서 영화는 말을 못하는 류의 속마음을 자막으로 처리한다. “누나가 못 자니까 나도 못 잔다.” 여기서 잔다는 의미는 중의적인 뜻을 담고 있다. 얼핏 보면 누나가 잠들지 못해서 자신도 잠들지 못한다는 단순한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그 자막이 뜨기 전 누워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담은 투샷에서 (반라의 상태인)류는 등 돌려 누워있는 누나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누워있다. 그 다음 쇼트에서 누나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기는데, 뒤이어 류가 누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쇼트로 연결되는 몽타주는 마치 남동생의 성적인 시선에 불편함을 느껴 이불을 끌어당기는 뉘앙스의 느낌을 준다. 이것은 마치 피곤해서 섹스를 하기 싫은 부부들의 상투적인 잠자리 위치도와 너무나 닮아있다.

그림1, 2


근친상간의 이미지가 조금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 장면은 류가 누나의 온 몸을 수건으로 닦아주는 쇼트이다.(그림1) 상징적인 애무로 보이는 이 장면은 가려진 이불 속 누나의 하체로 깊숙이 손을 넣어 닦아주는 행위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일부러 가려진 부분을 파헤친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불로 누나의 몸을 가림으로써 오히려 근친상간의 뉘앙스는 더욱 강해진다. 그녀의 몸을 가림으로 근친상간의 노골적인 혐의에서는 벗어나지만, 그것을 다시 파헤침으로 근친상간의 가능성 자체를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는다. 근친상간의 이미지는 부녀관계인 동진과 유선의 몽환적인 재회장면에서도 드러난다.(그림2) 딸의 죽음 때문에 절망에 빠져서 불면증에 시달리는 동진 앞에 유령 딸이 등장한다. 딸은 그녀가 죽을 당시처럼 물에 젖은 상태로 등장하는데, 동진은 반가운 마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딸을 껴안는다. 여기서 가장 특징적인 쇼트는 동진의 허리를 매우 강하게 휘어 감는 딸의 다리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일반적으로 죽은 딸과 산 아버지의 떨어지기 싫은 감정을 묘사한 것으로만 분석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 뚝뚝 떨어지는 물이 동진의 발밑을 적시는 장면이 몽타주 되면서 성적인 긴장감이 파생된다. 박찬욱 감독은 도덕적으로 남매관계보다 더 심한 비난을 받을 수 있는 부녀간의 근친상간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매우 조심스럽고도 은밀하게 기호들을 직조해냈다.

그림3, 4

부녀간의 근친상간이 내러티브의 중심축으로 사용되는 <올드보이>의 경우 암시에 깔려있는 은밀함의 정도가 더 심하다. 감금방에 갇힌 오대수가 너무 괴로워서 개미 환각을 겪을 때, 개미는 떼거지로 등장한다.(그림3) 하지만 미도가 외로움에 지쳐 개미 환각을 겪을 때는 거대한 한 마리의 개미가 등장한다.(그림4) 개미 환각에 대한 설명은 미도의 입을 빌어 “고독하면 무조건 개미죠. 내가 만나본 진짜 외로운 사람들은 다 잠깐이라도 개미 환각 겪었어.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개미들은 항상 떼로 댕기잖아요. 그래서 진짜 외로운 사람들은 개미 생각 하나봐. 물론 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지만.”라는 대사로 표현되지만, 이것이 그들이 겪은 개미 환각에 대한 원인을 전부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개미는 대표적으로 근친상간하는 집단이다. 오대수에겐 떼로 다니는 수개미의 환각을, 미도에겐 홀로 있는 암개미의 환각을 보여줬다. 암수의 구분이라는 디테일까지 신경을 쓰면서 근친상간에 대한 복선을 깔았던 것이다.

 

영화의 주제와 큰 관련이 없어 보이는 근친상간의 이미지를 이렇게 공들여서 창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근친상간이 도덕적 기준과 잣대를 파괴하는 가장 대표적인 상징이기 때문이다. 박찬욱이 늘 주장하는 “삶은 모호하다”는 문구처럼,(심지어 그의 영화사 이름조차 “모호필름”이다) 자로 잰 듯한 확실한 기준이 없이 모호한 가치들이 범람하는 것이 그의 작품세계의 또 하나의 특징인데, 근친상간의 이미지를 통해 가족애와 근친상간의 경계에 대한 질문을 의식적으로 계속 던진다. 소위 도덕적 판단이라는 것은 당대의 가치에 머물기 마련인데,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강한 박찬욱은 일반대중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가치파괴의 상징을 통해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은유적인 서브텍스트로 치환하여 지속적으로 표출하는 것이다. <올드보이>에선 한발 더 나아가서 근친상간 자체를 가장 중요한 소재로 끌어들인다. 원작 만화와는 다른 결말을 택한 <올드보이>는 근친상간이라는 소재를 사용함으로써 서사의 완벽성에 방점을 찍고 고대 신화의 비극과 겹쳐 보이는 착시현상까지 불러일으킨다. 심지어 모든 복수의 계획을 세운 이우진이 자살하기 전 마지막으로 오대수에게 하는 대사는 “누나와 난 다 알면서도 사랑했어요. 너희도 그럴 수 있을까?”이다. 이것은 사랑과 근친상간의 경계에 서서 사회의 비난과 마음속 죄책감에 휘둘리지 않고 살아갈 자신이 있냐는 철학적인 질문이다. 박찬욱은 근친상간이라는 변태성을 서브텍스트 혹은 메인텍스트로 활용하여 훨씬 다양하고 풍부한 효과들을 누리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박찬욱이 체제전복적인 예술가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박찬욱은 체제전복에 대한 질문을 던질 뿐이다. 그의 작품에서 체제전복을 꾀하던 캐릭터는 모두 죽거나 좌절한다. “아들이자 조카를 임신한 여고생”은 자살하고, 그녀를 사랑한 이우진 역시 자살한다. 근친상간을 밝힐 수도, 미도를 벗어날 수도 없는 오대수가 택하는 길은 자신의 정체성의 절반을 최면을 통해 마음속에서 삭제하는 비겁한 방법뿐이다.


화두2 : 페티시즘

스타일 분석을 통해 바라본 박찬욱의 작품세계는 페티시즘으로 만연해있다. 프로덕션 디자인의 그로테스크한 컨셉과 강렬한 색감을 차치하더라도, 배우의 몸에 대해 갖는 페티시즘을 미학으로 승화하는 박찬욱의 연출력은 가히 수준급이다. 박찬욱의 페티시즘은 일반적인 신체부위 뿐만 아니라 절단되고 훼손된 신체에까지 그 범위를 확장한다. 오히려 물리적 잔혹성에 의해 훼손된 신체에 대한 페티시즘이 일반적인 신체부위에 대한 페티시즘보다 훨씬 빈번히 포착된다. 먼저 페티시즘이 내러티브와 스타일에 교묘히 녹아있는 장면을 분석해보자.


그림5, 6

 오대수의 감금방에 최면을 걸러 들어오는 최면술사는 얼굴이나 상체가 아닌 다리의 이미지로 첫 등장한다. 트래킹 숏을 통해 그녀의 다리를 따라가던 카메라는 옆트임 때문에 훤히 드러난 최면술사의 각선미를 관음증적 시선으로 보여준다.(그림5) 게다가 복사뼈와 무릎, 허벅지가 그대로 드러나는 이 장면은 내러티브와 큰 상관이 없는 쇼트이다. 오직 페티시즘을 충족시키기 위해 구성된 셈이다. 물론 이 장면으로 끝난다면 페티시즘이라는 용어를 붙이기에 부족하겠지만, 이어서 분석할 장면에선 다리, 특히 무릎 페티시즘이 하나의 몽타주 효과로 쓰이기까지 한다.   


오대수가 모교인 상록고등학교를 방문하여 이우진과 이수아의 정보를 얻은 후, 나머지 단서를 캐내기 위해 들린 물레방 미용실에서 여사장에게 정보를 듣는 중간에 오대수의 시선은 여사장의 무릎에 잠시 머무른다.(그림6) 정보를 다 얻어갈 즈음 문 열리는 벨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돌린 오대수의 시선에 잡힌 것은 또 다른 무릎이다.(그림7) 매우 하얗고 약간 뒤틀린 무릎은 이질감을 형성하는데, 이때의 묘한 시각적 이질감은 [도어벨 → 자전거벨]의 청각적 오버랩과 함께 오대수를 과거의 기억으로 이끄는 장치로 사용된다. 이때의 시청각적 몽타주는 자연스러우면서도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자전거벨의 울림은 분명 어린 오대수가 청각적으로 체험한 것이었지만 자전거를 타는 이수아의 무릎 이미지는 어린 오대수의 시선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그림8) 자전거를 타는 이수아의 쇼트로 연결된 후, 그녀의 무릎에 대한 시선은 카메라의 것과 늙은 오대수의 것뿐이다. 텍스트 안에서 어린 오대수가 이수아의 무릎을 응시하는 쇼트는 한 컷도 나오지 않는다. 철봉에 매달려서 이수아를 바라보는 장면에서조차 어린 오대수의 시선은 그녀의 뒷모습만을 좇을 뿐이다.         

그림7, 8

 이것은 박찬욱의 페티시즘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양식적으로 굉장히 훌륭한 몽타주를 만들어냈지만, 그 기저를 분석해보면 페티시즘이 깔려있음을 명백히 확인할 수 있다. 단순히 몽타주 효과만을 노린 것이라면 청각적 요소인 벨소리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세밀히 분석하면 개연성이 떨어질 수도 있는 무릎의 소재적인 연결성을 활용하여 시각적 몽타주 효과까지 덧대어서 강렬하고 흡입력 있는 장면이 창조되었다. 이것이 단지 소재적인 연결성에서 그쳤다면 평범하고 상투적인 시각적 몽타주 효과가 되었을 것이지만 영화에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페티시즘(그림5에 대한 설명처럼) 때문에 이 장면이 더욱 두드러지는 효과를 누렸다. 페티시즘이 미학으로 승화된 가장 대표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9, 10

다음으로, 훼손된 신체에 대한 페티시즘을 분석해보자. 박찬욱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물리적 잔혹성은 복수 3부작의 대표적인 스타일일 것이다. 그러한 물리적 잔혹성은 내러티브 측면에서도 필연적이고, 양식적으로도 에둘러 표현되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노골적으로 표면화해서 거부감을 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동진의 기업에서 해고당한 팽기사가 복직을 위해 자신의 배를 커터칼로 자해하는 장면은 오직 스타일을 위한 쇼트였다.(그림9) 물론 팽기사라는 캐릭터가 후반에 내러티브에서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하긴 하지만 그가 자신의 배를 죽죽 그어서 피가 흐르는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잡은 쇼트는 영화에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잔혹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기보단(잔혹하다기 보단 역겹다) 훼손된 신체 페티시즘을 드러내기 위한 장면에 가깝다. 한 가지 사례를 더 들어보자. 오대수가 자신에게 고문을 가하려하자 이우진이 인공심장 이식을 받은 수술자국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그림10) 가슴 중앙에 길게 자리 잡은 흉터 역시 훼손된 신체 페티시즘이다. 이 쇼트 역시 후반의 반전에 힘을 실어주는 하나의 장치로 쓰이기는 하지만 수술흉터를 굳이 삽입하여 클로즈업으로 드러냈다는 것은 페티시즘의 함의에서 벗어나기 힘든 지점이다.     


<복수>에서 가장 학대당하는 몸을 가진 캐릭터는 류이다. 그는 늘 맞거나 신체를 훼손당한다. 심지어 그는 애초에 훼손된 몸을 지닌 농아이다. 류를 농아로 설정한 이유는 내러티브를 전개시키고 스타일을 위한 몇 가지 도구적인 측면으로는 설명될 수 있으나, 그 원인에 대해선 영화상에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관객은 그가 선천성 장애인인지 후천성 장애인인지조차 알 수 없는 것이다. 신체적으로 불완전한 그는 계급적으로도 가장 빈민 계층에 속하는데, 그런 설정을 지닌 그가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육체에 있어서는 영화 속 어떤 캐릭터보다 아름답고 건강해 보이는 것은 아이러니하다.(그것은 신하균이란 배우의 외모에 기댄 측면이 크다) 류가 오프닝 씬에서 혈액형이 달라 누나에게 신장을 이식해줄 수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은 야구 배팅이다. 말로 세상과 소통할 수 없는 류가 강인하고 매력적인 자신의 몸을 의사표현의 도구로 쓰리라는 것을 처음부터 암시하는 것이다.(그 다음에 이어지는 장면도 “육체”노동을 하며 땀 흘리는 모습이다. 이것은 류의 비참한 현실과 계급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지만 그의 육체성을 도드라지게 하는 효과도 있다) 세상에 절망하기 전의 류는 노동을 하거나, 신장을 파는 등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육체성을 행사하여 문제를 해결하지만, 삶의 이유였던 누나의 자살 이후부터는 폭력이라는 육체성을 행사하여 문제를 해결한다. 그런데 류가 가해자의 위치에서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은 시각적으로 과하게 부각되지 않는다. 물론 경동맥에 송곳을 꼽거나 이미 죽어버린 상대의 머리를 야구방망이로 계속 강타하는 행위, 자신이 살해한 장기매매 알선업자들의 장기를 씹어 먹는 장면 등은 충분히 잔혹하지만 그것이 노골적으로 시각화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류가 피해자의 위치에서 상해를 입은 상태는(상해를 입을 때의 상황이 아니라 상해를 입은 후의 상태. 다분히 페티시즘적인 시선) 굉장히 노골적으로 시각화되어 보여진다. 장기매매 알선업자의 메스에 찔린 상처를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는 장면과(그림11) 동진이 복수를 위해 류의 아킬레스건을 잘라서 벌어진 상처가 적나라하게 전시되는 장면이(그림12) 대표적이다. 류에게 불완전하지만 건강하고 아름다움 육체라는 아이러니한 설정을 안겨준 상태에서 그의 유일한 무기인 육체를 짓이기고 훼손함으로써(또한 그것을 자극적으로 표면화함으로써) 일종의 쾌락을 얻는 것이다. 심지어 류의 육체는 신체훼손의 극점으로 볼 수 있는 사지절단 상태에까지 이른다.(<복수>의 마지막 쇼트는 동진이 류의 시체를 묻기 위해 토막 내어 자루에 담아놓은 상태를 전시하는 장면이다!!) 훼손된 신체 페티시즘은 자연스럽게 다음 화두인 사디즘/마조히즘으로 연결된다.   

그림11, 12

 화두3 : 사디즘/마조히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복수>의 캐릭터 류는 가해자/피해자 역할을 모두 맡는다.(<복수>와 <올드보이>의 모든 캐릭터는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이다) 이것은 인간의 내면에 가학성/피학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과 맥락적으로 일치하는데,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쉽게 재단할 수 없는 인간의 모순성(혹은 박찬욱의 주장대로 “모호함”)을 드러내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관객은 도덕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어느 한편에 설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가학/피학의 동시성을 표현할 때 영화는 단순히 물리적 잔혹성뿐만이 아니라 사디즘/마조히즘으로 보이게 만드는 성적인 은유를 자주 포함시킨다. 


오대수가 15년의 감금생활을 마치고 처음 먹고 싶다는 욕망을 표출할 때 쓰인 대사는 “살아있는 게 먹고 싶다고 했다”이다. 일반적으로 식욕과 성욕이 함께 발현된다는 것과 “먹는다”의 대중적이고 상스러운 중의적 표현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살아있는 게 먹고 싶다는 표현은 충분히 성적인 함의를 담고 있다. 오대수는 살아있는 낙지를 날 것으로 씹어 먹는데,(그림13) 이것은 굉장히 사디즘적인 시선이 담겨있는 쇼트이다. “살아있는” 낙지를 가학적으로 씹어 먹는 오대수의 모습은 자신의 딸로서 “존재하는” 미도와의 근친상간을 통해 몬스터로 변하게 될 모습을 암시한다. 심지어 이런 가학적이고 괴물 같은 모습을 보이는 오대수에게 미도는 거부감이 아닌 호감을 드러낸다!!(그것을 최면의 효과로만 치부하는 것은 부당하다) 박찬욱은 오히려 오대수와 미도의 섹스씬을 평범하게 연출함으로써 이런 사디즘적 의도를 교묘히 숨긴다.

그림13, 14

오대수가 자신을 감금한 박철웅을 찾아내어 그에게 복수하는 장면은 굉장히 잔혹하게 표현되었다. 박철웅을 꽁꽁 묶어놓고 그의 치아를 장도리로 하나씩 뽑는 쇼트(그림14)에서 주목할 부분은 배경음악이다. 장도리로 치아를 뽑는다는, 상상만 해도 끔찍한 행위가 비발디의 겨울 1악장이라는 클래식 음악과 결합되면서 굉장히 고급스럽게 보이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겨울 1악장의 하이라이트 부분과 오대수가 박철웅의 치아를 뽑아내는 행위를 일치시킴으로써 양식적으로 훌륭한 리듬의 조화를 보여주지만, 클래식 음악의 사용이 단순히 스타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야만성을 덮기 위한 장치로도 쓰였다는 것이 중요하다. 사디즘이 명백히 드러나는 상황을 설정해놓고 유려한 스타일로 그런 측면을 순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지점은 박철웅에게 가해지는 각종 사디즘이 묘하게도 박철웅 스스로의 마조히즘으로 거듭나는 부분이다.


치아를 뽑힌 박철웅은 오대수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미도의 아파트를 습격한다. 미도를 묶은 후 옷을 찢어서 가슴을 만지는 등의 유린을 하다가 오대수가 돌아오자 똑같은 방식으로 복수하려 한다. 하지만 이우진이 제시한 돈을 보고 복수를 포기한 채 돌아서려 할 때, 오대수가 하는 대사는 “네 손목, 네 손목 잘라야겠어. 미도 유방 만졌잖아!!”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성적으로 유린한 손목을 잘라서(극단적인 폭력으로) 복수를 하겠다는 뜻인데, 이 부분에서도 역시 성적인 함의가 노골적으로 묘사됐다. 실제로 박철웅의 손목은 잘려서 오대수와 미도에게 전달되는데,(그림15) 중요한 것은 박철웅의 잘린 손목이 전달되는 시점이 오대수와 미도가 처음으로 섹스를 한 직후라는 점이다. 미도의 유방을 (성적으로) 유린한 손목을 복수라는 감정으로 잘라버리겠다고(가학성) 말한 것을, 이우진은 실제로 잘라서 그들의 가장 (성적으로) 충만했던 시간에 던져준 것이다. 유방 한번 만진 대가가 손목절단이라면 자신의 딸과 근친상간한 아버지에겐 어떤 형벌이 내려져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암시적으로 던지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오대수와 이우진 행위를 사디즘의 시선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면, 마조히즘의 징후는 피해자인 박철웅에게서 읽을 수 있다. <올드보이>의 내러티브에서 가장 설득력 없다고 느낀 부분이 바로 손목을 잘린 박철웅이 돈 때문에 그냥 넘어가는 부분이었다. 치아고문의 기회를 돈 때문에 날려버리고, 잘린 손목에 대한 반응도 돈 때문에 포기하는 박철웅의 캐릭터 자체가 마조히즘의 징후로 읽기에 부족함이 없다.(심지어 박철웅은 오대수가 미도와 함께 감금방을 방문했을 때, “적의 적은 친구잖아”라는 거짓연기까지 하는 치밀함을 보여주는데, 돈 때문에 손목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 사람치고는 너무 태연자약한 태도이다)

그림15, 16

지금껏 분석한 장면에서 사디즘/마조히즘의 징후가 따로 포착되었다면 영화의 절정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징후가 동시에 포착된다. 미도가 자신의 딸임을 알게 된 오대수가 어떻게든 미도에게만은 그 사실을 알리지 않기 위해 이우진에게 각종 굴욕적인 행동을 할 때 보이는 마지막 극단적인 선택은 자신의 혀를 자르는 것이다.(그림16) 이러한 행위는 “당신의 혀가 우리 누나를 임신시켰다니까. 이우진의 자지가 아니라 오대수의 혓바닥이.”라는 이우진의 대사에 대한 속죄의 개념으로 분석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자신이 목격한 것에 대한 원죄를 생각하거나 이야기에 신화성을 부여하려면 눈을 찌르는 행위가 더 전통적이었을 것이고, 아니면 굳이 혀를 자르지 않더라도 내러티브상으로는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혀를 자르는 행위를 선택한 것은, 내러티브의 완결성을 추구함과 동시에 사디즘/마조히즘을 동시에 드러낼 수 있는 효과적인 장치이기 때문이다.(마조히즘은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사디즘이란 정의도 있다) 사실 오대수가 혀를 자른다고 영화상에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오대수가 혀를 자르는 행위는 영화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물리적 잔혹성의 절정이자, 내러티브의 완성, 약간의 속죄 그리고 사디즘/마조히즘의 결합까지 표현해낸 매우 효과적인 장치이다. 영화상에서 늘 가해자, 혹은 피해자 한쪽의 입장만을 견지하던 오대수는 혀를 자르는 행위를 통해 가해자/피해자를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가학/피학, 사디즘/마조히즘의 서브텍스트에도 그 의미가 그대로 확장된다.    

그림17, 18

 <복수>에서도 비슷한 맥락의 장면들이 포착된다. 류의 행방을 캐내기 위해 영미를 찾아온 동진. 동진은 영미에게 전기고문을 하기 위해 그녀의 귀를 빤다.(그림17) 귀를 빠는 것은 일반적으로 성애의 순간에 어울리는 행위다. 애무라고도 볼 수 있는 귀를 빠는 행위를 굳이 적나라하게 클로즈업으로 구성한 것은 전기고문을 위한 준비과정으로만 보기엔 의심의 여지가 있다. 전기고문이라는 굉장히 가학적인 행위를 하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애무를 연상시키는 귀를 빠는 행위를 보여준다는 것은 역시 사디즘의 시선이 녹아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올드보이>의 마지막처럼 <복수>의 마지막도 캐릭터의 흥미로운 행위로 구성되었는데, 이 장면에서도 사디즘/마조히즘이 동시에 느껴진다. 복수를 마친 동진이 류의 시체를 묻기 위해 땅을 파는데, 웬 낯선 남자 넷이 들이닥친다. 그들은 갑자기 동진을 사방에서 찌른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어떤 선고문 같은 것을 동진의 가슴에 대고 찌른 후 떠나는데, 동진은 괴로워하면서도 동시에 그 선고문이 어떤 내용인지를 궁금해 한다.(그림18) 칼을 몇 방이나 찔리고 죽어가는 와중에도 자신의 가슴에 붙은 선고문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동진의 모습은 굉장히 아이러니하면서도 유머러스하다. 이러한 아이러니가 바로 이분법으로 가를 수 없는 인간의 모순성과 모호함을 표현하는 마무리인 셈이다. 오대수는 스스로 혀를 잘랐지만 괴로워한다. 오대수의 행위에서 사디즘/마조히즘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 행위의 “스스로”에 방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진의 마지막은 타인에 의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마지막까지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인 호기심을 떨쳐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자식도 죽고, 복수도 끝난 마당에 죽어가면서 하는 행위라는 것이 겨우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행동이다. 동진의 경우엔 “원초적인 욕구”에 방점을 찍어서 사디즘/마조히즘을 동시에 읽을 수 있었다. 이것은 마치 삶과 죽음이 자연의 한 조각이라는 말처럼, 죽음의 순간에도 원초적인 욕구를 표출하는 아이러니를 통해 주제가 선명히 드러남과 동시에 서브텍스트로서의 기능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론을 짓기에 앞서 근친상간, 페티시즘, 사디즘/마조히즘이 일반대중적인 입장에서 변태성으로 분류되기에 이런 식으로 챕터를 나눴음을 밝힌다. 사실 변태성이라는 것이 어디에 기준을 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내가 화두로 잡은 세 가지가 어떤 이들에겐 전혀 변태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의 의견을 존중함을 분명히 밝힌다.


이 소논문의 제목을 “박감독의 은밀한 변태성”으로 지은 것은, 본론에서 설명했던 근친상간의 상징적인 이미지나 페티시즘이 굉장히 은밀하게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변태성을 최대한 숨기면서 은연중에 드러나도록 만들기 위해 엄청나게 머리를 굴린 것이다. 박찬욱 감독은 주제와 내러티브 전개의 중심축을 잃지 않으면서 영화의 스타일이 드러나는 장면들에서 교묘하게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들을 표출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상징과 은유, 암시와 기호를 통한 의도전달은 매우 세련된 방법이기에 쉬운 선택지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브텍스트를 통해 작가의 제3의 의도를 영화의 커다란 주제와 동시에 전달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한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영화를 예술이라고 정의 내렸을 때, 이러한 노력들을 하지 않는 작품들이 과연 예술로 분류될 수 있는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박찬욱의 근래작인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나 <박쥐>에선 자신의 취향을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경향이 느껴졌다. 초심으로 돌아와서 앞으로도 “은밀한 변태”로 남을 수 있는 박찬욱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by 끝까지 | 2009/11/24 02:24 | FILM | 트랙백 | 덧글(0)

[베토벤 바이러스] - 인터넷 담론이 드라마에 끼치는 새로운 영향

 

1. 들어가며


인터넷이 급속적으로 발전한 지난 몇 년간, 드라마 제작자들은 시청자의 반응이 가장 빠르고 활발하게 생성되는 인터넷에 더욱 민감해졌다. 드라마에 대한 애정과 관심의 크기가 커질수록 시청자들은 드라마 제작자들에게 더 많은 요구를 하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제작 전반에 관한 참여까지 원하게 되었다. 시청률에 민감한 드라마 제작자들은 발 빠르게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려 노력했고, 가장 능동적인 시청자 참여방식인 인터랙티브 드라마의 제작까지 가능케 만들었다. 특히 IPTV나 DMB 시장의 확대는 그러한 상호작용성(interactivity)[시청자가 방송에 대해 단순히 반응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청자의 반응에 다시 다른 시청자나 제작진이 재반응하는 일련의 상황을 일컫는 것으로 단순한 양방향이나 반응과 구별되는 양자 간의 커뮤니케이션 문제이다.(Rafaeli, 1980)]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리라는 예측을 낳았다. 실제로 메가TV에서 제작한 세계 최초 IPTV 전용 드라마 ‘미스터리 형사’는 시청자가 방영 초기부터 각 주인공에게 맞는 테마음악을 선택할 수 있고, 등장인물의 의상, 촬영 장소, 소품 등의 정보가 실시간으로 제공된다. 드라마 마지막에는 두 가지의 다른 시나리오 중 시청자가 원하는 결말을 선택해 볼 수도 있다. 위성DMB 방송사업자 TU미디어가 제작한 "정재용의 극단적 하루"의 경우는 시청자에게 결말 전까지 극을 보여준 뒤 스튜디오에서 생방송으로 시청자 의견을 접수받아 다수가 선택한 내용으로 마무리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드라마의 상호작용성은 점점 다양하고 획기적인 방식으로 저변을 넓혀왔다. 하지만 할리우드에서 인터랙티브 시네마 아이템이 등장했을 때, “인터랙티브 시네마가 향후 십여 년 간 할리우드에서 등장한 가장 바보 같은 아이디어로 꼽혔듯이”국내의 인터랙티브 드라마 역시 태동과 동시에 명백한 한계가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대중의 기호란 의외로 다양하지 못해서 몇 가지 원하는 패턴, 유행하는 패턴이 정해져 있다. 따라서, 비슷한 시기에 나오는 드라마들이 시청자 의견을 모두 중시한다면, 서로 분간할 수 없는 비슷비슷한 내용으로 닮아갈 우려가 있다. 배우 선호도 마찬가지다. 즉 ‘거기서 거기’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드라마 편당 제작비가 케이블, IPTV, DMB에 비해 높고 광고시청률에 목숨을 거는 공중파의 경우에는 너무도 급진적 모험인 인터랙티브 드라마를 제작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오히려 공중파의 경우, 시청률 지상주의로 인한 연장방영, 쪽대본과 날림편집의 횡행, 그로 인한 배우의 컨디션 난조 등으로 사전제작 시스템의 도입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훨씬 높았다. 실제로 드라마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의 경우, 대부분 사전제작 시스템으로 드라마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 역시 사전제작 드라마가 몇 작품 제작되었으나, 대부분 시청률이 저조하였다. “편성권을 쥐고 있는 방송사들이 편성을 해주지 않으면 사전제작 드라마의 좋은 취지가 발휘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실제로 60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비천무’는 제작된 지 4년, ‘도쿄, 여우비’도 촬영이 끝난 지 1년 만에 편성이 확정돼 시대에 뒤떨어질 가능성이 있었다.”(서병기, 「사전제작 드라마, 약인가 독인가」, 헤럴드 경제(www.heraldbiz.com), 2008) 이렇듯 공중파 드라마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믿어지던 사전제작 시스템 역시 그다지 높은 완성도를 뽑아내지 못하고 구조적 한계까지 보인 후, 별다른 변화 없이 드라마 산업은 지금까지 진행되었다.


하지만 현재의 드라마는 작지만 분명한 변화를 겪고 있다. 100% 사전제작이 아닌 적정수준의 사전제작과 방영 후 각종 피드백을 참고한 동시제작이 합쳐져서 이루어지는 시스템의 도입이 그것이다. KBS 드라마 ‘봄의 왈츠’ 윤석호 PD는 “일본 NHK 관계자 등은 한국 드라마의 강점을 시청자와의 피드백이라고 보고 있다.”며, “20∼30%를 만들어 던져 놓고 시청자의 느낌을 받아들이는 제작 시스템이 맞지 않나 싶다.”고 소견을 밝혔다. 하지만 단순히 사전제작과 동시제작의 비율 문제일까? 시청자의 반응을 “얼마나” 받아들이냐가 아닌, “어떻게” 소화하느냐의 문제가 바로, 이 시대 드라마 제작자들이 탐구해야할 지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여대 언론영상학과 주창윤 교수의 다음 발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 드라마 풍토에서는 사전전작제가 완벽한 대안은 아니다. 어차피 드라마가 시청자를 위해 만드는 것이라면 시청자의 이유 있는 항변과 감성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제작진이 시청자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제작자의 스타일과 세계관을 지키면서도, 허구 속 인물의 감성을 고스란히 전달받으며 자신의 감성을 키우고 위안 받는 시청자의 반응과 트렌드를 받아들이는 ‘공동작가주의’로 제작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본론에서는 MBC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2008년 9월 10일~2008년 11월 12일)와 국내에서 가장 거대한 게시판 사이트 디씨인사이드(www.dcinside.com)의 [베토벤 바이러스 갤러리]의 시청자 반응을 중심으로 현재의 드라마와 인터넷 담론의 관계맺음이 어떤 식으로 형성되고 있는지, 장단점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다.  



2. 인터넷 담론의 순기능과 역기능


디씨인사이드(이하 디씨)는 국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터넷 사이트 중의 하나이다. 각종 관심사들에 대한 갤러리(다른 사이트의 클럽이나 카페와 비슷한 역할)를 만들어서 네티즌들로 하여금 같은 취미를 공유하고 담론을 형성하게끔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그중에서도 드라마 카테고리에 속해 있는 갤러리에서 활동하는 네티즌들은 엄청난 활동과 영향력을 보이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이벤트와 리뷰북 제작이다. 갤러리 이벤트는 스타덤과 팬덤의 결합에서 나온 단순한 선물공세가 아닌, 드라마 전체에 대한 관심의 표출이다. 한명의 스타에 대한 애정이 아닌(물론 그렇게 되기까지의 원동력은 스타에게 의존하는 측면이 크다 - 좀 더 정확히는 드라마의 캐릭터), 드라마 전체에 대한 애정의 일환으로서의 선물공세이기 때문에 말단 스탭에게까지 선물이 고루 전달된다.

 

[베토벤 바이러스 갤러리](이하 베바갤) 역시 이벤트가 이뤄졌다. 매니아성이 있거나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는 대부분 갤러리 주도의 이러한 이벤트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드라마 종영 시 드라마에 얽힌 각종 일화와 이야기, 사진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리뷰북은 갤러리 소속 일반인이 모여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완성도가 높기로 유명하다. 이벤트나 리뷰북 제작의 표면만 본다면 단순한 팬덤의 발전형이지만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은 바로 이들의 ‘전문성’이다. 확실히 예전의 주먹구구식 팬덤과 비교하면 스탭 몫의 선물까지 꼼꼼히 챙긴다던가, 독감예방접종까지 제공할 창의성은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문가가 만든 프로덕션북보다 더 프로페셔널한 리뷰북(물론 쓰임새는 다르겠지만) 제작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한 전문성이 드라마에 대한 담론으로 이어질 때, 드라마 제작진이 인터넷 담론을 무시하지 못하고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베토벤 바이러스’(이하 베바)는 독선적이고 냉소적인 세계적 지휘자 강마에와 비전문가들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 단원들 간의 이야기다. 이야기 자체의 구성이나 흐름은 일반적인 드라마와 큰 차이가 없지만 클래식과 오케스트라라는 소재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졌다는 점에서 다른 드라마와 차별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베바’가 시청자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고수한 이유는 바로 김명민이 연기한 강마에라는 캐릭터 때문이었다. 캐릭터를 위해 눈썹을 밀고 목소리까지 바꾸며 연기한 김명민의 노력은 희대의 캐릭터를 만들어냈고, 작가와 연출자는 자신의 의도에 완벽히 부합하는 강마에의 탄생에 만족했다. 하지만 문제의 발단 또한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베바’의 팬들이 강마에라는 캐릭터에 너무 심취하여 숭배하는 담론이 지배적이 되자, 역설적으로 그들이 사랑한 캐릭터는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시청자가 열광하는 강마에와 싸우는 기분이었다. 9~10회 나오고 나서 감독의 첫 마디가 “어떡하죠?”였고 답변이 “큰일났죠?”였다. 강마에가 점점 신격화·영웅화돼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우매한 민중을 강력한 지도자가 새 세상으로 이끈다, 라는 기획 의도와 정반대인, 절대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탠 것이 질투다. 어떤 장면에서도 강마에의 편이 되어 있는 시청자에게, 욕 엄청 먹겠다 하면서도 그렇게 갔다. 다른 드라마는 캐릭터 띄우기에 여념이 없는데, 우리는 중반에 ‘박살을 내자’는 식이었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 자문자답하면서도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베토벤 바이러스’ 작가 홍진아, 홍자람 인터뷰, 한겨레 21 735호)


위에서 증명하고 있듯이 인터넷 담론이 베바에 끼친 영향은 오히려 인터랙티브 드라마의 그것보다 더 강렬한 것이었다. 특히 흥미로운 지점은 현대의 정치․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있는 담론의 형성이다. 아무리 강마에 캐릭터가 매력적이고 김명민의 연기가 훌륭했다고는 하나, 그는 분명 독재자에 독설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목적인 숭배의식에 젖은 담론이 형성된 것은 현실도피의 기제가 작동한 영향이 크다.

      

“강마에는 좋은 리더가 아니다. 나쁜 사람이다. 나쁜 면을 강조해서 보여줬는데 사람들이 열광한다. 그 부분에 목말랐나 싶은 생각도 들면서 겁이 더럭 나기도 한다. 그는 독재자다. 말 안 해주고 나만 따라와라고 한다. 자기 합리화의 달인이다. 모순 많고, 말 안 되는 것이 아주 많다. 그런데 그런 것 집으면 지금은 작가가 역적 되는 분위기다.”

     

이러한 현상에서 가장 집중해야할 지점은 [①제작진 - ②드라마 - ③시청자 - ④현실 - ⑤제작진]으로 순환하는 관계맺음이다. ①제작진이 애초에 설정한 기획의도는 초반 사전제작 된 분량에 분명하게 포함되어 있다. ②하지만 드라마가 제작되면서 캐릭터는 스스로 살아서 움직이게 된다. “참 재미있는 게 똑같이 대본을 쓰는 건데도 방송이 시작되고 나면, 드라마는 자기만의 생명력을 갖게 된다. 대본, 연출, 연기 세 가지가 맞물려서 유기체가 탄생되는 느낌이다.” ③시청자는 드라마에 몰입하면 몰입할수록 드라마의 전체적인 완성도 측면의 객관성에서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 “5회부터 같은 시간대 1위를 하면서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그러면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시청자를 만났다. 어떤 사람은 멜로만 보고, 어떤 사람은 악단만 보고, 어떤 사람은 악기만 본다. 리뷰에 활이 떴다, 손가락이 안 맞았다는 등 연주에 대한 이야기만 있다.” ④강력하고 실력 있는 지도자의 부재에 따른 현실반영은 애초에 ①에서 의도한 바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게 된다. ⑤결국 각주5)와 같이, 이러한 모든 요소가 제작진에게 반영될 때는 전혀 다른 방향의 결과를 초래하고, 드라마의 완성도는 용두사미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강마에 캐릭터에 질투라는 감정이 보태지는 시점부터 내러티브는 삐걱거리고 시작했고, 시청자들의 원성 또한 가장 격해졌다) 오히려 초반에 시청자들이 우려했던 국내 드라마의 고질병인 멜로코드의 남발은 인터넷 담론의 피드백을 통해 적정선에서 마무리 되었다. “피드백 속에서 내 안의 강마에가 멜로에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인터넷 담론 내에서 표면적으로 가장 강력히 우려됐던 지점은 피드백을 통해 순화되었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지점에서의 반응이 제작진을 궁지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이것은 분명한 변화이다. 인터넷 담론의 역할은 이미 시청자가 잠시 들러 리뷰를 끼적거리는 팬덤의 공간을 넘어서, “보이지 않는 손” 즉, 제2의 제작진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전문직 드라마라는 장르적 본분에 충실하게, “무엇무엇하다 연애하는 이야기” 식의 흔해빠진 통속극으로 마무리 되지 않았던 것은 인터넷 담론이 ‘베바’에 끼친 순기능이다. 그렇다면, 기획의도와 정반대로 가는 시청자 반응에 우려를 느낀 제작진이 강마에 캐릭터에 무리수를 둬가면서까지 질투라는 감정을 덧입혀 내러티브를 전개시킨 것은 순기능인가, 역기능인가? 이것은 좀 더 고민해봐야 할 문제이다. 제작진이 인터넷 담론을 통해, 시청자에게 기획의도가 제대로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파악하게 된 것은 순기능이지만, 그로 인해 완성도에 금이 가고 시청자의 반감까지 사게 된 것은 분명한 역기능이다. 하지만 재밌는 점은, 강마에 캐릭터가 그렇게 흔들리기 시작한 시점인 14회부터 18회 종영까지 시청률 변화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14회 19.2%, 15회 19.7%, 16회 20.7%, 17회 19.5%, 18회 20.3%) 제작진 입장에서는, 시청률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 인터넷 담론에는 신경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무리수를 두게 만들어 완성도에 악영향을 끼친 것을 제외하면, 결론적으로 인터넷 담론은 ‘베바’에 전반적으로 순기능으로써 작용했다.(물론, ‘베바’ 제작진이 인터넷 담론을 적절히 수용했다는 대전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다시, 사전제작과 동시제작의 문제로 돌아와 보자. 사전제작에는 인터넷 담론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역기능보단 순기능이 많은 인터넷 담론의 적절한 수용은 동시제작이 가지는 큰 장점으로 부상할 것이다. 제작진이 애초에 가지고 있는 기획의도를 손상시키지 않고, 인터넷 담론을 수용하면서 자가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은 역시 사전제작 + 동시제작 시스템일 것이다. 현재 대부분의 드라마가 그렇게 제작되고 있고, 이 시스템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임은 큰 이견이 없다. 그렇다면, 서문에서도 언급했듯이 결국 관건은 시청자의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의 문제인데, '베바'의 케이스로 파악할 수 있는 방법론을 제시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3. 마치며


‘베바’가 진행되는 동안 베바갤에서 드라마 내적으로 가장 활발히 논의되었던 두 가지는, ①드라마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멜로코드 삽입에 대한 우려와 ②강마에 캐릭터에 질투가 덧입혀지면서 돌출되는 개연성 없는 내러티브에 대한 비판이었다. 전자는 제작진에 긍정적으로 반영이 되어 별다른 무리 없이 순기능으로 작용하였다. 하지만 후자는 제작진이 초심을 잃지 않게 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었으나, 무리수를 두게 만들어 완성도에 금이 가게 했다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낳았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를 파악하면 드라마 동시제작 시 인터넷 담론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가닥이 잡힐 것이다.


①과 ②의 가장 큰 차이는, ①과는 달리 ②의 경우, 제작진이 인터넷 담론을 수용함에 있어 “캐릭터”를 건드리고 말았다는 점이다. ①의 경우, 전문직 드라마라는 장르 측면에서나, 강마에의 냉소적이고 독설적인 캐릭터 측면, 어떤 관점에서 보아도 시청자의 요구는 구구절절이 옳았다고 생각된다. 게다가 그러한 시청자의 요구는 다른 드라마와의 차별성을 강화시켜 ‘베바’를 더욱 빛나게 하는 지점이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그러한 요구의 반영이 ‘베바’의 핵심인 강마에 캐릭터에 무리한 변화를 가하는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②의 경우엔 제작진이 기획의도와 반대로 가는 인터넷 담론을 의식하여, 캐릭터의 매력을 잃게 하면서까지 무리수를 뒀다. 그것은 바로 개연성 없는 내러티브로 직결됐고, 시청자들의 많은 원성을 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시청률은 변화가 없었다. 기획의도, 완성도, 시청률, 시청자 반응, 이렇게 네 가지 항목으로 분류했을 때, 제작진의 무리수에 의해 완성도와 시청자 반응 두 가지 항목을 놓쳤는데, 바로 여기 함정이 있다. 애초에 점점 떨어지는 완성도에서 기획의도를 읽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데다, [시청자 반응 ≒ 인터넷 담론]이라고 볼 경우, [인터넷 담론 ≠ 시청률]이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인터넷 담론은 어디까지나 소수의 의견이다. 개방성과 편의성으로 인해 인터넷 담론이 시청자와 제작진이 소통할 수 있는 가장 큰 장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전체 시청자 대비로 따져보면 결국은 소수의 의견인 것이다. 그렇기에, 제작진이 인터넷 담론을 수용할 때는 기획의도 혹은 시청률만을 맹목적으로 쫓는 방향이 아닌, 캐릭터완성도에 중점을 두는 방식으로 가야한다. 사전제작 분량에서 캐릭터를 확실히 만들어서 시청자에게 제시를 하고, 동시제작 분량을 만들어가면서 완성도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인터넷 담론을 캐치해내는 것이 앞으로 드라마 제작진이 적극적으로 모색해야할 지점이다.  


서문에서 언급한 서울여대 언론영상학과 주창윤 교수의 발언 후반부를 다시 곱씹어보자.


“제작자의 스타일과 세계관을 지키면서도, 허구 속 인물의 감성을 고스란히 전달받으며 자신의 감성을 키우고 위안 받는 시청자의 반응과 트렌드를 받아들이는 ‘공동작가주의’로 제작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앞으로 인터넷 담론의 영향력은 점점 더 강해질 것이고, 시청률에 민감한 드라마 제작진들은 그것에 더욱 귀 기울여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다. 인터넷 담론을 활용하는 것이 ‘공동작가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면, 제작진과 시청자 모두 인터넷 담론을 활용함에 있어 조금 더 성숙한 입장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 ‘베바’의 경우, 인터넷 담론을 수용하는 방식의 기준이 부재하여서 벌어진 시행착오라고 판단된다. 제작진과 시청자 모두, 드라마의 완성도가 높길 바라고, 재미있길 원한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드라마의 완성도와 재미의 기준이 제작진, 시청자 각각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제작진은 인터넷 담론이 시청률과 직결된다는 착각을 버리고, 냉정하게 선별하여 수용해야 하고, 시청자는 흥미 위주의 담론보다는 공동의 작가라는 개념에서 접근하여 생산적인 담론을 창출해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질 높은 드라마의 재생산으로 이어지는, 인터넷 담론과 드라마 제작진의 윈-윈 전략이 될 것이다.



by 끝까지 | 2009/08/18 22:10 | ANOTHER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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